'적당한 모자람'은 그 부족을 채워가는 동안행복을 맛보게 하는 텃밭입니다.너무 완벽하면 그 완벽을 유지하기 위한강박의 굴레에 갇혀 불행해질 수 있습니다.진실로 이 땅에 완벽한 사람이 있을까요?완벽하다고 하는 착각만 있을 뿐이지요.기대치를 낮추면 같은 짐이라도 훨씬 가벼워져요.먹고 입과 살기에 조금은 부족한 듯싶은 재산~!모든 사람이 칭찬하기엔 조금은 부족한 외모~!자신이 생각하는 것의 절반밖에 인정받지 못하는 명예~!남과 힘을 겨룰 때, 한 사람에게는 이기고 두 사람에게는 질 정도의 체력~!연설할 때, 듣는 사람의 절
♥울고 싶을 땐 펑펑 울어라~♥춤추고 싶을 땐 내 몸이 하자는 대로 흔들어라~때로는 내 마음이 가는 대로, 내 몸이 요구하는 대로, 정직하게 헤아려 귀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고 묻지도 말고, 주위의 시선에 너무 눈치도 보지 말고~, 몸이 아픈 것은 관심을 가져 달라는 긴급한 몸의 신호입니다. 마음이 괴로운 것은 애매한 억울함 속에 있는 나 자신을 이해 받고 싶다는 마음의 갈증입니다.꽤 오래전 일입니다. 심성수련 전(前)단계 체험과정에 초대된 경험이 있습니다. 온갖 상념과 적체된 관념을 내려놓기 위해, 생각할 겨를도 없이 쓰지
목표를 이루고도 행복하지 않다면 무엇을 위한 성공일까요?먼 훗날 그 어떤 자리를 차지하려는 간절한 소망 하나만으로 지금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 있다면 언뜻 그럴듯해 보일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이 눈치 저 눈치 보면서 아등바등 한 가지 목표에만 매달려 살아가는 삶이라면 ‘성공의 감옥’에서 노예로 사는 것이 아닐까요?하루하루, 열심히 살아가는 과정에서 최선을 다하다 보니 보너스로 기대 밖의 성과를 거두고 목표를 달성하는 경우라면 그런 인생은 노예가 아니라 주인으로 사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최선을 다하는 것 자체가 이미 기
“지금까지”는 “지금부터”를 위한 소중한 경험이었습니다.낭비같이 보였던 허망한 세월도 지금 내가 그것을 어떻게 여기고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서 그 가치가 결정됩니다. 미련이 남는다고 해서, 흘러간 과거에만 붙잡혀 있으면 앞으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과거는 내 기억속에 저장된 자료파일일 뿐이니까요. 지금의 나는 그 자료의 주인이지, 그것의 노예가 아닙니다. 또한 오지 않은 미래의 공상에 너무 붙잡혀 있어도,이 또한 현재의 경이로움을 놓치게 됩니다. 생각에 사로잡힌다 하는 것은 대부분 과거와 미래의 망상이니까요. 좋았던 과거가 다시
아시는 바와 같이, 사람이 볼 수 있는 빛은 한정되어 있는데 이를 가시광선(可視光線)이라고 하지요. 사람이 들을 수 있는 소리도 한정되어 있어서 이를 가청음(可廳音)이라 하구요. 가시광선은 수많은 빛 가운데 극히 일부이고, 가청음도 역시 수많은 소리가운데 극히 일부라는 사실은 관련분야 과학자들이라면 모두 잘 알고 있는 기본 상식입니다. 이처럼, 종류가 다른 짐승들마다 각각 들을 수 있고 볼 수 있는 범위가 역시 다르기 때문에, 어떤 짐승들은 지진이나 쓰나미의 징후를 미리 포착하고 안전지대로 대피하는 것 아니겠어요?그런데 사람이 들을
지고(至高)한 행복은 “채워짐”보다 “자유함”에 있습니다.우리가 먹고 싶었던 과일을 먹을 때, 처음 한 개를 먹을 때의 만족감과 두번째 세번째의 만족감은 같지 않습니다. 만족감과 행복감은 경험을 거듭할수록 줄어들지요. 이것을 경제학에서는 “한계효용체감의 법칙”이라고 합니다.이렇듯 원하는 것이 주어지는 경우도 쉽게 되는 일은 아니지만, 계속 주어진다고 해도, 그 행복은 시간에 반비례합니다. 명품 그림을 거실에 걸었을 때도 처음에는 정말 멋지고 기쁨을 더해 줄지 몰라도 매일 보면 그게 그거 지요. 나중에는 그것이 거기에 있는지 없는지
'치앙마이’여행을 하면서 느낀 점 하나를 공유하고자 합니다. 묶인 코끼리와 갇힌 새가 행복한들 얼마나 행복할까 하는 것입니다. 그곳, “매땡 코끼리학교”에서 코에 끼워준 붓으로 코끼리가 그림 그리는 과정을 직접 보니 참으로 놀랍습니다. 코끼리가 이정도로 그림을 그리려고 하면 얼마나 가혹한 훈련이 필요했을까? 엄청난 힘을 지닌 코끼리를 이처럼 순종토록 만들기 위해서는 우선 무력으로 제압을 해야 하는 기본단계를 거칩니다. 그런 후에 당근과 채찍을 반복하여 사용합니다.언젠가 코끼리 훈련과정이 TV에 적나라하게 방영된 적이 있는데,
우리는 모두 행복하기를 원합니다. 모두가 원하는 이 행복이 어떤 조건에 의해서, 어떤 능력에 의해서 절대적으로 결정되는 것이라면 부유한 조건, 탁월한 능력을 소유한 몇 사람만 행복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실상을 보면, 가진 사람도 불행한 사람이 많고, 가지지 못한 사람도 행복한 사람이 많습니다. 그렇다면 행복은 순간 순간의 느낌이며 삶의 지혜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괴로우면 불행을 느끼고, 즐거우면 행복을 느낀다는 단순한 이치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느낌이 괴롭지 않고 하는 일이 즐거울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관건이겠지요
삶이 너무 복잡해서 탈진 직전이라면 하루씩 마감하는 삶을 한 번 살아보세요. 내가 또 다시 내일을 어제처럼 맞이할 수 있을 것인지는 사실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 것이 인생이니까요. 밤새 안녕이라고 하더니 폭우와 산사태로 살던 집이 흔적도 없이 없어질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죽을때가 되면 원한도 원망도 정리할 때입니다. 죽음을 맞이하는 그 때가 가장 정직한 순간이니까요. 그래서 죽을 때가 되면 용서하고 용서받으며 뒷정리를 깨끗이해야 편안한 마음으로 미련없이 떠날 수 있을 겁니다.만약, 매일 죽는다면 이런 것들이 매일매일 정리될 것이며
자발적으로 가난을 선택한 사람은자족을 말할 수 있습니다. 욕구는 큰데, 능력부족으로 부유하지 못한 입장에서가난을 찬양한다면,그것은 자기 자신을 기만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부유하게만 살아왔으면서 가난을 찬양한다면,그것은 맛도 못 본 음식을 맛있다고 하는 것이나다름 없습니다. 매월 빠르게 돌아오는 직원들의 월급날이 두려운기업체 사장이 되어보지 못하고서기업하는 사람들을 도둑으로 매도하는 것도이와 마찬가지 입니다. 배고픈 서러움을 경험하지 않은 배부른 사장이빈궁한 근로자들의 인격을 함부로 폄하하는 것도이와 같습니다. 능력은 있으면서도 자
진실로 귀한 것은 그것이 없어졌을 때 알 수 있어요. 평상시 당연한 것이라 여겨 보지 못했던 필요가치가 그제서야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우리는 스치는 고마움만 고마운 줄 알았지요. 필요에 의한 가치보다 교환가치만을 더 소중하게 여겼지요. 교환가치는 희소가치가 있어 돈이 되기 때문이라고요? 산소나 물은 무한이 많기 때문이라고요? 그렇다면 무한히 많지 않은 가족에겐 왜 그 가치에 감사하지 못했습니까? 매일매일 함께 생활하고 고민도 함께 하면서 가족 생계의 수단이 되는 일터와 동료와 상사보다 졸업한지 수십년 된 동창을 더 소중하게 여
누구에게나 자기 옷이 있습니다.자기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맞춤형 자기 옷이 있습니다. 은행나무는 노랑 잎이단풍나무는 빨강 잎이자기를 가장 아름답게 연출시키는 자기 옷입니다. 포도원에 있는 무화과나무가 포도열매를 맺을 수 없듯사과 밭에 있는 감나무가 사과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남의 옷을 빌려 입어도남의 집으로 들어갈 수 없듯이,남의 인생을 모방해도남의 열매를 맺을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지어주신 자기 옷을 최고로 인정하고그 옷에서 즐거움을 찾고 멋을 느낄 때,우리의 삶은 가장 아름답게 피어날 것입니다. 그러기에 남의 옷과 비교하
조화로운 일’은’ ‘좋은 일’이고‘나 뿐인 일’은 ‘나쁜 일’입니다. ‘나만 잘 되면 그만’이라는 이기심,‘나만 최고’라는 영웅의식,‘나는 너희와 다르다’는 우월의식,‘나만 행복하면 남의 눈물은 아랑곳하지 않는’ 이런 비정한 마음가짐으로는함께 더불어 사는 행복을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독선 독단이 너무 심하면 조화를 이룰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남’을 경계하여 담을 높이 쌓은 것만큼,결국 ‘나’를 높이 가두었기 때문입니다.그래서 ‘나 뿐인 사람’이 되어버린 거지요. ‘열심히 하는 것’과 ‘잘 하는 것’은 별개의 이야기 입니다. 좋은
열정의 고개를 넘고 분노의 바다를 건너소리 없는 아우성의 정글을 지나왔다.한 고개 두 고개 구비마다 젖어있는 눈물은애환의 노래였고 영혼의 시조였다. 색(色)이든 공(空)이든 채움이든 비움이든‘새 하늘과 새 땅’으로 안내하는 세련된 도우미였다.각을 세우며 아픔을 안겼던 그네들마저도 걸어온 순례 길에서 만났던 숙달된 조교였다.갈등 없는 그 곳에 이르렀을 때, “그 때는 그것을 몰랐었노라”고 고백하며 얼싸안기를 바라오.어둠은 밝음을 드러내주는 한 순간, 조연에 불과 했음이 명백히 드러나길 바라오 “상대의 세상”에서는 도무지 알 수 없었던
물처럼 바람처럼구름을 탓하지 않는 산처럼굴곡을 탓하지 않는 물처럼머물러 시비하지 않는 바람처럼애착하거나 증오하지 아니하며걸림 없이 여여(如如)하게 그냥 그렇게 살 수는 없는 것일까? 지금, 나를 옥죄고 있는 가장 큰 주범은 사실 나 자신입니다.관념과 체면과 습관의 노예가 되어 스스로를 강박의 끈으로 묶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만든 자기감옥의 열쇠는 남이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자유(自由)함을 부르는 잃어버린 나의 열쇠는 밖이 아니라 내 안에서 찾아야 합니다. 안이 어둡다고 해서안에서 잃어버린 열쇠를밖에서 찾을 수는 없잖아
이 시대를 함께 살고 있는 우리는 군중 속에서도 고독하고, 풍요 속에서도 공허하며, 발전된 문명 속에서도 마음이 편치 않게 살아가고 있습니다.저마다 자기를 가두는 프레임 속에서 확 트인 지평을 바라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자신을 짓누르는 각자의 현실 문제를 가슴에 안고 힘겹게 살아가고 있는 것이 엄연한 우리의 현실이지만 이를 극복하는 처방을 얻지 못하는 것은 우리의 일부가 되어버린 편견과, 진리처럼 굳어진 저마다의 신념이나 지식이, 오히려 알아야 할 것을 알지 못하게 하고 보아야 할 것을 보지 못하게 하기 때문입니다.괴로움을 고착시키
홍천이 고향인 윤영호 작가의 '마음감옥에서 탈출하는 열쇠꾸러미'가 현재 교보문고 등 국내 대형문고에서 절찬리 판매되고 있다.증조부 때부터 홍천군 동면 노천리가 뿌리인 윤영호 작가는 국내 굴지의 대기업과 중견기업 임원으로 오랜 직장생활을 정년 은퇴하고 노천에 귀항한지 4년째 접어들었다.중앙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ROTC장교로 예편한 그는 중동지역 쿠웨이트를 비롯한 국·내외에서 많은 기업활동을 하는 중에도, 각종 월간지나 매체에 그의 글이 실렸고 한국문단에서 시조대상을 받기도 했으며, 공정거래질서확립 유공자 정부포상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