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층 창밖으로 연 삼 일국숫발처럼 쏟아져 내리는 비아스팔트 위에 연한 물꽃 피우고 있다작년 여름에는 밥주발보다 큰 꽃을 피우더니오늘은 간장 종지보다 작은 꽃을 피운다주차된 버스 지붕 위에도현관 지붕 위에도가로등 갓 위에도잔디밭 돌 위에도우산 위에도경비원 구두코에도소리 없이 피자마자소리 없이 져버리는
삐약거리던 노란 병아리들 모두 떠났는가?덩그런 운동장 모퉁이 향나무 옆이승복 어린이 동상 홀로 울고 있다“나는 외로워서 싫어요”텅 빈 교정 돌아보니용머리는 아직도 쓸만하고이십삼 년 전 풍경 몰라보게 흐트러졌어도사각 창틀 안 교실에는병아리들 발자국 흐릿하게 남아있고낙서 자국 자욱하다들고양이들 서성대는 교무실 앞을 지나긴 복도를 지나면머리카락이 하얗게 세어 버렸을 담임선생님창가 타고 오르던 나팔꽃 따라아직도 풍금을 켜고 계실까행여 다칠세라병아리떼 쫓던 어미 닭들도 모두 떠났을까알아볼 수 없게 커버린 나무들만덧없는 나이테를 헤아리며빛바랜
집에 들어서면 습관적으로 티브이를 켠다실내복으로 갈아입은 뒤 안락의자에 몸 뉘이고리모컨 버튼 누르는 순간 현실의 중력에 억류되었던몸과 마음의 세포 붕 떠오르기 시작한다아무것도 하지 않을 자유에 휩싸여 무엇이든내 맘대로 세계를 조종할 수 있는 초능력자가 된 기분이다리모컨 하나면 드라마 다큐멘터리 스포츠 홈쇼핑 등속어느 세계라도 잠입할 수 있다나는 그 속에서 함께 울고 웃고 흥분하고 화내고침 흘리고 졸다 리모컨의 온·오프대로 깨고 잠든다나의 시선은 모니터라는 프레임 안에 갇혀있다생활이 밖으로 나를 불러낼 때까지
나지막한 지붕들이 모여 산을 이루고쪽문으로 달빛 들인 산동네외지 사람들 좁은 골목길 돌아나가도은가락지 하나 잃어버렸다는 소문 하나 없고제삿날 굴비 한 마리 구워놓아도도둑고양이만 어슬렁댈 뿐찾아오는 조상 하나 없는 골방비닐하우스의 낮은 추녀 밑으로 먼동이 찾아오면때 절은 모자 눌러쓰고산돌처럼 큰길가로 굴러내리는 사람들도심의 매연 속으로 희미한 저녁이 찾아오면막노동으로 허기진 언덕길달빛 따라 오르는 사람들
한때는 이백여 호 넘게 사는 동네였다네아이 태어나고 늙은이 세상 떠나는 일계절의 순환처럼 균형 있게 이루어지는 곳이었다네도시로 떠날 수 있는 사람 모두 떠나고장전분교는 폐교되고 노인들만 남게 되었다네산전 묵밭 되고 다니지 않는 길 많아지고풀숲 되어 박새 꿩 직박구리 등속 내려앉는다네틈나면 몇몇 경로당에 모여 화투 치거나게이트볼 쳐 술추렴하는 게 일이라네종다리 노질하는 소리 하늘에 가득한 봄이면새싹들의 호탕한 웃음소리 들린다네지글지글 끓고 후두득후두득 내리꽂히는 빗소리 머금고곡식 무럭무럭 자라는 소리 들리는 여름 가고똘방똘방 가을 여
오십여 년 동안 사랑에 빠진 추녀처럼잇몸에 박혀 떨어질 줄 모르던 이빨들고달픈 막노동 즐기며차돌이다 유리다 온갖 것 가리지 않고맷돌질하여 맛깔나게 씹어주다갈라지고 깨지고 벌레 먹고 돌출되었다십여 년 전 때우고 씌우고 뽑고 심는 대공사그때 대체로 들여놓은 임플란트 중노동에 못 배겨난 왼쪽 아래 어금니가출 충동이는지 들쑤셔대며 마구 흔들어댄다밥알들이 장애물 경기를 한다시도 때도 없이 불쑥 솟아치근덕거리는 녀석과 함께한 달포 전국 사찰 순례 다닌 죗값톡톡히 치러야 할 판이다썩은 암모니아 냄새가 풀풀 난다깊어진 잇몸 염증 치료할 수 없어발
상처의 찬란한 꽃밭낯선 채찍의 장단에 맞춰 광대 춤을 추었다밤마다 거대한 빌딩 숲을 싸돌아다니며공황의 공포로 두근거리는 도시의 심장소리 들었다밤이면 화려한 네온 내뿜다가새벽이면 토사물 부려놓는 냉온 시스템의 도시시나브로 내 안의 청청한 빛 사라지는 나날들안개와 구름 달빛과 햇살을 소리 없이 받아들이는 숲,저마다 빛깔 내뿜는 그곳에 안착해서야비로소 잿빛으로 시들었던 속뜰이 서서히소생하기 시작하였다
바람 무늬져 오는 이른 저녁투덜대는 무릎 달래며 걷는성복천 길섶 곳곳미상(尾狀)으로 태어난 어린 새끼들반갑다 연실 꼬리 흔들어댄다가지에 조롱조롱 매달려잔광을 향해 고사리손 뻗고 있는앙증맞은 녀석들손바닥에 올려놓고 가늘게 흔들어주면혀 내밀어 핥으며살랑살랑 기어오르는 녀석들무럭무럭 늙어가는 나를잠시나마 생명의 열락에 들게 하는봄의 어린 자식들
유리벽에 불두덩 바싹 붙이고 입댄 채눈 껌벅거리며 눈알 닦는 알지이터*는금색의 찬란한 붓다의 옷을 입고 태어났으나그만 수족관에 버려진 고아그의 직업은 환경미화원이다아귀처럼 생긴 입에는 마술적 흡입력을 가진 빨판이 있어유리 돌 수초에 붙어사는 이끼를 빨아먹고다른 어족들이 먹다 남긴사료 찌꺼기까지 깨끗하게 먹어치운다거실의 불이 나가고 수족관에도 밤이 찾아오면골드 알지이터는 뜬눈으로 지새우며열대어들의 숙면을 위해 야간 노동으로 분주하다차가운 유리벽에 거듭 입술을 부벼 일으킨 수증기로바깥에서 밀려오는 불빛을 안간힘으로 밀어내고 있는그의 수
천구백구십삼 년 사월 칠일한국전력기술에 경력사원으로 입사했다수줍음 많은 채송화 만나고우아한 자태의 목련 만나고칙칙한 물푸레나무 만나고둥글둥글한 단호박 만났다딱딱한 박달나무 만나고거칠거칠한 느릅나무 만나고깐깐하고 무식한 밤나무 만나고매콤한 고추나무 만났다뜨거운 참나무 만나고예쁜 새침데기 앵두나무 만나고만나고, 만나고, 만나며나는 학교에 다니듯 직장을 오갔다나를 가르치는 스승들 많았다두꺼운 책 많이 읽었다밑줄 그며 많은 걸 익혔다그리고 마침내 울고 웃던 학교를 졸업했다이별은 미의 참이다이제 나는 시계 없는 학교에 입학하겠다
소리의 먼지가 쌓이고 있다귓속에서 밤낮 시냇물이 흐른다나뭇가지가 바람을 흔들고 바위가 파도를 끌어안는다똬리를 틀고 세력을 번창시키며 진 치고 있는 놈들막무가내 일가를 이루고 있다귓속으로 그 소리들을 불러들인 건 나다그러니 내 속에 사는 너는 얼마나 답답할까출구를 잃어버린 소리들이귓속에서 살림내고부턴 환하게 웃어본 적 없다피곤할수록 소리가 더 커지고적막과 고요가 잠을 사납게 흔들어댄다아이처럼 달래보지만 더 치열해진다숲에 들어 풀잎 사이에 귀를 내려놓는다귀가 운다 지축을 흔들며 귀가 울고 있다
꾸중 듣는 날이면 저수지 둑에 앉아 물속 드나드는 풍경을 바라보았다 작대기로 풀숲 툭툭 칠 때마다 개구리들 앞다투어 다이빙하고 퉁퉁 불은 젖 흔들어대며 한가로이 풀 뜯는 흑염소며 물결 차며 이륙하는 제비 편대를 바라보곤 하였다 공납금 내지 못해 담임에게 꾸지람 듣던 날에도 저수지를 찾아갔다 방류된 물이 수로를 따라 쏜살같이 달려가는 것을 보고 불쑥 가출 충동이 일기도 했다 사는 일 어린 마음에도 막막하고 아득하기만 해서 자맥질하는 오리떼 바라보며 민박집 주인이 되는 꿈을 꾸기도 하였다 저수지는 내 어린 날의 학교 그곳을 오가는 동안
시골 다녀온 뒤 짐 정리하다가우연히 가방 속 무당벌레 한 마리 보았다불쑥 반가운 마음에 두 손으로 조심스럽게 모셔거실 한구석에 내려놓았다날아오르다 유리창에 부딪혀 곤두박질쳐댔다새로 장만한 아파트 구경 온다고 봄내 벼르다농번기 비켜 서울 아들 집에 들러구석구석 둘러본 흥도 잠시 거실에서 쭈뼛거리다멍하니 창밖 내다보던 어머니의 뒤태무당벌레 무늬처럼 서럽게 고와 보였다소 거두는 아버지 밥걱정에 사흘 못 넘기고가야 한다고 성화대던 어머니 눈에 선했다
첫 아이 낳았을 때아이보다 먼저 아내의 젖을 빨았다비위에 거슬렸지만빨다 보니 우유처럼 고소했다어릴 적 시오리 하굣길 허기 달래려염소젖 빨던 때가 떠올랐다둘째 때도 젖이 넘쳤다두 남매는 무럭무럭 자랐고나는 무럭무럭 늙었다세 식구 모두 아내를 닮아갔다
한 아이는 오줌으로 그림을 그리고한 아이는 자기가 싼 똥으로 글씨를 쓰고 있네요어른 보기에 몹쓸 장난 짓으로 보이겠지만마음 여린 유치원 선생님이 보내온 가정통신문에는‘예능에 소질 있음’이라고 쓰여 있습니다
중, 고등학교 다닐 때키 큰다는 바람 같은 말에 홀려쉬는 시간마다 철봉에 매달려 있던 K수업에 늦어 꾸지람 들었다공부보다 키 크는 게 우선이라던 K불혹지년에 홍천 장터에서 만났다키 크기는커녕 팔만 쭉 늘어났다서 있을 때면 손끝이무릎 밑까지 내려와 있다
논머리에 서 있는 미루나무가 달리기한다몸을 뒤집고 팔다리 흔들며짧아진 바지 입고 팔라당팔라당 달린다새참 내올 때 잠깐 지나가는 비에베잠방이 살짝 적시어연한 속 살결 밖으로 얼비치는 마누라별안간 미루나무 밑으로 끌고 가일 저지른 바람에 태어난 녀석논배미의 가생이에서 만들었다해서 전두(田頭)라 이름 지어 불린다미루나무 닮아 무럭무럭 자라 바지 짧아지고코밑 턱주가리 꺼뭇꺼뭇해진 녀석돈 벌러 서울 가서공장에 취직했다는 소문 꺼지기도 전에고무대야처럼 엉덩이 크고 넙데데한 처녀꼬드기어 데리고 왔다 여름내 들에 나가 노닥거리다해거름 짊어지고 들
굶주림에 좀도둑 많던 시절긴밭들 초입 산 밑에 괴나리봇짐 내려놓고땅 파고 돌 쌓아 움막 짓고눈만 뜨면 죽자사자 산나물 뜯어방앗간에서 얻은 밀기울 쌀겨 섞어 쑨 풀떼기로하루하루 연명한다삶아 말린 여유분 천장에 매달아 놓았다가호미 들고 지나가는 윗마을 아지매 불러한 다발씩 들려 보내던 세월늙어서 거동이 불편해지자 어느새지붕에 골이 파이고 검버섯이 진을 친다이장이 걷어다 준 곡식으로 끼니 때우며움막 앞에 쪼그려 앉아 햇살 부르고장에 오가는 사람들 구경하다말동무 할아부지 찾아드는 날이면꼬깃꼬깃한 십 원짜리 한 장황천길 갈 노잣돈 꼭 훔켜쥔
가끔 여관방에 들어가 있는 상상을 해본다낯선 여행지의 숙소가 아닌 도심 속체액과 타액으로 범벅된 덩그런 침대정사 뒤 허망한 열정 씻어내는 욕실성급한 포옹에 이어지는 잠깐의 고양숱한 이야기 쌓여있는,두꺼운 커튼 조악한 패턴의 이불남루한 청춘의 욕정 감추느라딸꾹질하다 한쪽은 치근대고 또 한쪽은눈 동그랗게 뜨고 뻗대다 결국서툰 사랑의 생태학 싹 틔울 밤꽃 내음에황홀한 열병 식을 줄 모르는,초호화 스위트룸 아니어도 사랑 복종시킬 마력의 정글취객같이 대낮에도 불콰하게 달아오르는
나랑 함께했던 벗이여빌려온 365일싱그러운 빛으로 살자미워하지 않고시기하지 않고다투지 않고, 어서잊을 건 잊고 용서할 건 용서하며즐겁게 살자눈길은 고요하게마음은 따뜻하게아름다운 삶으로 여유 있게또글또글 웃으며 살자새해 첫소리 듣는 순간처럼힘찬 걸음걸이로더 많이 사랑하고더 많이 행복하고더 많이 건강하자고자신과 무언으로 약속하자소망 담은 구름 속 해맞이였지만다짐한 것 막힘 없길두 손 모으며 살자나랑 함께했던 벗이여사랑하는 나의 벗이여* 시집『가슴에 이 가슴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