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천박물관이 구석기 문화를 테마로 두 번째 기획전시를 선보인다.신규 기획전시는 ‘홍천의 석기장인들’과 홍천의 대표인물을 다루는 패널전인 ‘홍천의 인물전’으로 진행된다.전시는 홍천교과서로 더 잘 알려진 서적 ‘홍천 역사·문화이야기’와 연계해 자칫 딱딱하고 지루할 수 있는 주제를 쉽고 편안하게 구성해 관람객들에게 다가갈 계획이다.전시회에서는 홍천에서 출토된 구석기 유적·유물과 중부지역 구석기 유물 등 100여점이 함께 소개될 예정이다.또 홍천의 인물전에서는 고려시대 팔만대장경을 만든 홍천 용씨의 시조 ‘용득의’를 주제로 첫 번째 인물전
시대를 막론하고 서민은 늘 사는 게 녹녹치 않다. 아니 녹녹치 않아 서민이다. 코로나로 인해 전 국민이 힘들어하자 정부는 재난 지원금으로 서민의 숨통을 틔워주었다, 급격한 소비 위축으로 소상공인들이 힘들어지자 소상공인들을 위한 별도의 지원책을 시행하기도 했다.조선시대에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흉년이 들거나 자연재해가 닥치면 평민은 당장 끼니 걱정을 해야 했다. 어디선가 돈을 마련해 쌀을 구해야 했다. 지인에게 융통하던, 대출을 받던 출구를 찾아야 했다. 가을걷이가 신통치 않으면 춘곤기부터가 문제다. 당장 보릿고개를 넘겨야 연명이 가
지난 일곱번째까지는 필자의 정리한 74개 금석문 가운데 24기가 있는 홍천읍을 소개하였고 금번 여덟번째에는 홍천군의 중앙에 위치하고 있는화촌면과 동북쪽의 두촌면의 금석문에 대하여 소개하기로 한다.화촌면은 홍천군의 중앙부에 위치하고 있는데 면적은 약 211㎢(군의 11.6%)이며 인구는 4,700여명이다. 법정 11개리, 행정 18개리를 관할한다.1413년(태종13년)에 처음으로 화촌(化村)면으로 명명된 이래 化村 또는 花村으로 불리다가 1895년(고종32년) 홍천 9개면 중 하나가 되었고일제강점기 1917년 행정구역 개편시 화촌(化
전 세계가 1년 넘게 코로나로 몸살을 앓고 있다. 14세기 유럽 인구의 20%가 사망했다는 흑사병(페스트)에 버금가는 혼란이다. 전염병은 늘 우리와 함께 했다. 가까이는 메르스(2015년), 신종플루(2009년), 사스(2002년)가 있었고, 괴질로 불린 콜레라는 당시 사망률이 40% 이상이었다. 모기로 감염되는 뇌염과 결핵균에 의한 결핵도 사람들을 공포로 몰아넣었다.좀 더 거슬러 올라가 조선시대에도 전염병은 늘 공포의 대상이었다. 원인을 알 수 없기에 모두 역병(疫病) 혹은 돌림병이라 통칭했다. 두창, 성홍열, 장티푸스, 이질,
홍천읍지를 읽다보면 공해(公廨)라는 낯선 단어와 마주하게 된다. 공해는 관이 소유한 건물을 의미한다. 좁은 의미로는 공적인 업무를 집행하는 청사만을, 넓은 의미로는 청사와 그 부속 건물은 물론 관에서 건설한 창고, 누정 등을 포함한다. 더 나아가 관공서가 모여 있는 지역을 말하기도 한다. 관아(官衙), 관서(官署)와 같은 의미로도 쓰인다. 즉 공적인 업무를 다루는 관공서를 말한다.요즘으로 말하면 홍천군청 혹은 홍천군이 소유 및 관리하는 기관 및 부대시설을 말한다. 홍천군의 경우 1개읍 9개면의 행정복지센터(면사무소), 보건진료소,
홍천향교 여성유도회(회장 김정숙)가 지난 12일 홍천향교 석화루에서 임원들이 참가한 가운데 용문-홍천 철도 유치를 위한 홍천군민 응원 릴레이 챌린지를 펼쳤다.여성유도회는 홍천향교 춘기와 추기석전 봉행을 주도적으로 수행함은 물론, 신년 새해맞이 기원제, 지역사회의 원로와 유림들을 모시는 도배례와 기로연, 홍천관내 청소년들을 위한 전통 관계례식 등을 개최하며, 여성 유림으로서 향교문화 발전을 위해 선도적인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특히, 홍천군과 홍천교육지원청, 성균관 등과의 연계사업으로 예절 교실을 운영하며 어린이와 청소년들을 위한 전통
홍천향교 청년유도회(회장 김춘근)가 지난 10일 홍천향교 명륜당 앞에서 용문-홍천 철도 유치를 위한 홍천군민 릴레이 응원 챌린지에 동참했다.김춘근 회장은 “용문-홍천 철도는 홍천강시대를 여는 견인차 역할을 한다. 홍천 철도 유치를 통해 홍천이 명실공히 수도권 배후도시로 성장하며, 사통팔달 강원도의 중심도시로 성장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를 나타냈다”며 “올해의 철도 유치 열망은 기존의 어느 해 보다도 열기가 높고, 철도 유치를 위한 염원으로 온 군민이 하나가 되고 있는 이때에 홍천군과 강원도는 이번 기회를 놓치지 말고 철도유치를 위해
조선 시대 성(姓)은 사람을 가늠해 보는 잣대였다. 거기에 본관(本貫)까지 더해지면 그 사람의 집안이나 사회적 신분까지도 유추가 가능했다. 지금이야 많이 사라졌지만 첫 대면에서 본관과 성씨를 소개하는 것만으로도 자신을 드러내는 사회가 조선시대였다.조선시대 홍천에는 어느 성씨가 살았을까? 이에 대해 홍천읍지에서는 성씨(姓氏)에 기록을 남겨 놓았다. 성씨(姓氏)는 성을 높여 부르는 말이다. 성은 출생의 계통을 나타내기 위해 이름 앞에 붙이는 칭호다. 女+生으로 이루어진 성(姓)은 여성의 몸을 빌어 태어난 혈통을 말한다. 고대 모계사회에
지난 여섯 번째까지는 홍천읍 금석문 24기중 연봉리선정비군 16기, 홍천박물관내의 홍천현감 원만춘 청백선정비 그리고 홍천향교 입구의 3기〔하마비, 군수 이낙응기념비, 홍천향교 보수기념비(추정)〕에 대하여 소개하였고 금번 일곱번째에는 홍천읍의 마지막으로 삼마치의 마애선정비 2기, 장전평의 옥류동천 암각명, 홍천화산공립심상소학교정문을 소개하기로 한다. 홍천읍 삼마치리 75번지 옛 국도변(주유소 뒤쪽) 벌통 밑 자연석에는 2기의 마애선정비가 위치하고 있다. 마애비(磨崖碑)라 함은 자연석에 글 또는 그림을 새겨 놓은 것을 말하는데 무슨 이
허필홍 군수는 지난3일 북방면 김효성 묘역에서 정이품송 자목을 식재했다.홍천군은 조선 세조가 벼슬을 내린 정이품송의 자목으로 이야기가 있는 관광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세조와 인연이 있는 홍천군청, 수타사, 정희왕후 태봉, 김효성 묘역, 수타사 농촌테마공원 등 5곳에 정이품송 자목을 식재했다.
제영(題詠)은 특정 대상을 상대로 시를 짓고 읊는 것을 말한다. 제영은 『홍천현읍지』 12수, 『신증동국여지승람』 1수, 『관동지』 33수, 『강원도지』 1수 등 총 47수의 제영이 기록되어 있다.이중 『신증동국여지승람』과 『강원도지』의 제영은 강릉판관과 원주목사, 강원도 관찰사를 지낸 조선 초기 문신 이맹상(李孟常)이 홍천에 관한 단상을 짧은 시로 표현했고, 『홍천현읍지』와 『관동지』 제영은 모두 범파정에 관한 것이다.시는 두 번의 창작 과정을 거친다. 첫 번째 창작은 시인의 몫이고, 두 번째 창작은 독자의 몫이다. 한시의 해석은
제82회 한서 남궁억 선생 추념식이 4월 5일 오전 10시 30분 홍천읍 연봉리 무궁화공원에서 홍천문화원(원장 박주선) 주관으로 개최된다.독립운동가이자 교육자, 언론인, 종교인으로 활동한 남궁억 선생은 1896년 서재필, 이상재 선생과 함께 독립협회를 창립하고 황성신문을 창간하며 독립활동을 펼쳤다.이후 1918년 서면 모곡리로 낙향해 모곡교회와 모곡학교를 설립하고 무궁화 보급운동을 전개했다.홍천군은 남궁억 선생이 1977년 건국훈장을 받은 이후 남궁억 선생의 기일인 매년 4월 5일 추념식을 개최하며, 남궁억 선생의 애국정신을 계승하
지난회(다섯번째)까지 홍천읍의 금석문 24점 중 연봉리 무궁화공원 회전교차로 옆의 홍천의 선정비군 16기에 대하여 소개하였다.이 선정비 16기는 원래 홍천현의 관아거리인 (구)홍천군청(현재는 홍천미술관) 부근의 도로옆에 있던것을 현재의 위치로 옮겨진 것으로 최초 17기 중 현감 원만춘청백선정비(철비)는 홍천향토사료관(현재는 홍천박물관)으로 옮겨 전시중이다.또, 군수 이병석 기념비는 현감 김창일 선정비로 대체되어 세워져 있으며 홍ㅊ너읍 선정비군에 대한 어떠한 설명도 없어 군민들이 이해하기에는 어려움이 있는것도 사실이다.16기는 강원도
홍천읍지가 쓰여진 조선 시대에 충(忠)과 효(孝)는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 중 으뜸이었다. 임금에 충을 행하지 않으면 역적이고, 부모에게 효를 행하지 않으면 폐륜이었다. 임금이 사라진 21세기에 충에 대한 시각은 다양하지만 효 만큼은 여전히 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도리로 여긴다. 『강원도지』에 홍천의 효자에 관한 기록이 남아 있다.‘조선 시대 박성채는 영암 사람으로 무과 출신이다. 박경우의 후손으로 감찰사를 지냈으며 후에 좌승지에 올랐다. 3살 때 친어머니를 여의고 계모 밑에서 자랐다. 박성채는 부모를 섬김에 있어 지극 정성을 다했다
홍천군은 3월부터 12월까지 전 국민을 대상으로 홍천군 민간기록물을 수집 해 공모전을 개최한다.민간기록물 수집 공모전은 개인이 보유한 홍천군과 관련된 보존가치가 있는 모든 형태의 기록물을 수집하는 것으로 수집된 기록물은 안전하게 보존·관리되며 추후 온·오프라인으로 전시할 계획이다.공모 대상은 행정업무 관련 기록물을 포함해 개인이 소장한 홍천 관련 사진이나 근현대 기록물 등 홍천군과 관련된 모든 유형의 기록물이다.이번 공모전으로 사진이 흔치 않았던 시절의 옛 기록을 통해 과거의 홍천 모습을 추억하고 현재의 모습과 대비시켜 홍천의 변화
객관적인 사실의 나열이 빼곡한 홍천읍지에서 ‘사람 이야기’는 색다름이다. 삼종지도(三從之道), 일부종사(一夫從事), 칠거지악(七去之惡) 등 유교가 통치이념이었던 조선 시대였던 만큼 ‘사람 이야기’도 말랑말랑하기보다는 교훈이 앞선다. 시대 상황을 빼고 읽어보면 애틋하고 애틋하고 또 애틋하다.『홍천현읍지』와 『강원도지』에 각각 열녀(烈女)와 열부(烈婦) 항목이 나온다. 열녀(烈女)와 열부(烈婦)의 사전적 의미는 고난이나 죽음을 무릅쓰고 절개를 지켜 남의 모범이 될만한 여자이다.열남(烈男)은 사전에 없다. 열부(烈夫)는 절개가 굳은 선비
지금까지 네번에 걸쳐서 홍천의 금석문을 소개하면서 필자가 조사 / 정리하였던 75점의 금석문중 홍천읍 연봉리 무궁화공원 회전교차로 옆의 강원도관찰사 / 홍천현감 / 군수선정비 10점을 소개하였다.10점중에는 강원도관찰사(겸순찰사) 선정비 2기(정시성 / 윤성대), 현감 이세백 / 최일 / 이한 / 남지구(2기) / 윤홍거 / 이장오 / 윤형은 이었는데 그중에 도윤혁파 공로의 선정비 2기, 역대 현감중 현감 임기를 끝까지 마치지 못하고 암행어사보고 / 혐파(파직) / 하급직위 전보 3기가 포함되었다.이번 다섯번째에는 16점중 아직 소
길은 삶이다. 사람과 사람은 길로 만나고 도시와 도시는 길로 이어진다. 역사의 변화 저변에는 늘 길이 앞선다. 길이 있어 사람이 다니고, 사람이 다녀서 길이 생긴다. 오솔길은 사람들의 디딤으로 소로(小路)가 되고, 시간을 업어 중로(中路)가 되어, 세월을 품고 대로(大路)가 된다. 물론 요즘은 필요와 계획에 의해 산에 터널을 뚫고 강에 다리를 놓아 가장 빠른 길을 만든다. 사람의 흔적조차 없던 대지에 길이 생기는 것이다.그렇게 만들어진 홍천 길이 2개다. 동서로 남북으로 길을 냈다. 춘천에서 북방면, 화촌면, 내촌면을 거쳐 인제로
향교는 관아 2리 안팎에, 사찰은 깊은 산중에 있는 사연은?고려 말기에서 조선 초기의 큰 변화 중 하나는 억불숭유 정책이다.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는 고려의 불교를 억누리고 유교를 숭상하는 정책을 폈다. 고려의 부패 원인을 타락한 불교에서 찾으면서 조선 건국의 명분 중 하나로 삼았다.불교는 고려의 국교였고, 유교는 조선의 새로운 국교로 자리 잡았다. 불교는 사찰로, 유교는 향교로 대중들과 접점을 찾았다. 조선 시대 향교는 늘 관아 근처에 있었다. 반면 사찰은 깊은 산중에 자리를 잡았다. 조선 시대 억불숭유 정책과 무관하지 않다.사
지난 3회째 연재에서는 홍천읍 금석문중 연봉리 무궁화공원옆 도로가에 2열로 세워져 있는 16개의 강원도 관찰사(순찰사) / 홍천현감 선정비 일부를 소개하였다.겸순찰사 정시성 애민선정비는 홍천과 정선, 경북울진(조선시대에는 강원도 강릉부 울진현) 등 3개소에 설치되었는데 건립연도는 동일한 1682년(숙종8년)임에도 홍천의 선정비는 명나라 연호인 숭정(崇禎)을, 정선의 선정비는 청나라 연호인 강희(康熙)를 사용하였으며 홍천의 선정비는 조선선정불망비군총록(김동복)에 의하면 내촌면에 있다고 기록되어 홍천읍으로 이전 설치된것으로 추정된다.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