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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강부터거꾸로 매달려 온갖 고난 다 겪는,서걱서걱 서릿발 치솟는,시퍼런 칼바람 비집고 드는,지붕 밟고 내려온 낮 빛살 스미는,별 없는 그믐밤 빛살 스미는,암고양이 암내 풍기는,할아버지 술주정하는,함박눈 소복소복 쌓이는,때까치 박새 참새 등속 먹이 찾는,소나무 잣나무 등속 삭정이 부러지는,고라니 목 빼고 입맛 다시는,거무죽죽한 영혼들 흔들거리는,댕댕이들 허공 북북 찢어대는,이 소리 저 소리 온갖 소음 다 받아들이고움켜쥔 고요 가르며 길 내주는,오묘한 맛 왜 우려내는지 이제야보글보글 알게 하는
시캐는 농부(시인 안원찬)
안원찬
2020.10.21 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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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 현란한 풍경보다 내 성장의 그림자 품고 있는, 무릎까지 눈 쌓인 시오리 등하굣길 검정 고무신에 신겨 다녀도 입 한번 내밀어본 적 없던, 참외 수박 사과 무 닭 서리해도 눈감아 주던, 참새 박새 콩새 꾀꼬리 직박구리 까치 다람쥐 고라니 염소 밤새 웃음꽃 피우다 쓰러진 풀처럼 뒤엉켜 잠자도 아무 일 없던, 개살구 개복숭아 돌배나무 등속 전구 매달고 주린 입들 시장기 쫓아주던, 산토끼 꿩 물고기 개구리 잡아 허연 버짐 벗겨내며 무럭무럭 자라던, 사람으로 치면 족히 기이는 되었을 밤나무 오뉴월이면 발기되어 길 가는 아낙들 콧구멍 속
시캐는 농부(시인 안원찬)
안원찬
2020.10.14 1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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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집 장광에 놓인 금 간 항아리 빗물 고인 바닥에밤이면 별과 달 들어와 글썽거리고한낮에는 건달 같은 뜬구름 들어와 한숨 붙이다 간다한때 고추장 된장 간장 담그며 뜨겁게 삭았던 적 있는,이사 가는 자식들에 버림받은 뒤 홀로 남겨진 노인천천히 자연으로 돌아가는 중이다
시캐는 농부(시인 안원찬)
안원찬
2020.10.07 1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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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에 다녀오던 저물녘별안간 진통 찾아와 콩밭에 들어가 해산했대서돌림자 상相에 두豆자를 붙여 상두라 이름 지었다 한다콩알 상판에다가 두부처럼 물러터진 아들이강가에 매어놓은 배처럼 늘 조마조마했다는 청양댁사업자금 내놓으라는 아들의 어깃장에어떻게 제 태어난 본적을 내다 팔 수 있겠느냐며눈에 흙 들어가기 전 어림없는 수작이라고오늘도 고개 절레절레 흔들어댄다
시캐는 농부(시인 안원찬)
안원찬
2020.10.01 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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밭둑에 서 있는 살구나무매화 같은 꽃을 수만 송이 피워주는 쭈글쭈글한 자궁이다고집 세고 강건한 할머니, 후덕한 마음으로해마다 흐드러지게 피워주는 꽃에 온 동네 훤하다탱글탱글 영그는 푸른 살구 노랗게 익어저절로 떨어질 때까지 한 번도 흔들어 본 적 없는 살구나무땔나무 장사로 장만한 텃밭 지키며지나가는 사람들 반갑게 불러 찬치 벌리는 할머니다봄에는 눈을, 여름에는 입을 즐겁게 해주는살구씨 속에 든 달콤한 하이얀 속살 많이 먹었다그리하여 기침 천식 기관지염 인후염을 모르고 사는내 입속에서는 늘 달콤한 살구 맛이 난다그러기에 그 향과 맛을
시캐는 농부(시인 안원찬)
안원찬
2020.09.23 1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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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이 삼태기처럼 감싸 안은 긴밭들멀리서 개 짖는 소리숲속 얼기설기 비켜 있는 달그림자에흔들리는 나뭇가지 담벼락에 그리는 괴기한 그림자오솔길 멀리서 가만가만 피어오르는 밤안개삐걱거리는 변소 판자문 소리돌쩌귀 울어 덜렁거리는 광 문짝 소리하늘로 날아가는 기러기들의 울음소리낙엽들이 뒹구는 건조한 목소리가로수 가지 위에 걸터앉아 흔들리고 있는 조각달하늘 끝자락 따라 우쭐거리며 춤추는 산 주름도둑괭이의 울음소리서낭당에서 손뼉 치며 부르는 차가운 노랫소리오소소 떨며 등 밀어주는 마른 땀
시캐는 농부(시인 안원찬)
안원찬
2020.09.17 1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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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밭들 응달마을에서 땅에 코끝 대고 거친 숨 빨딱거리면 봉화산 중턱 양지에 벼루 천지 같은 작은 마을, 열네 가구 중 상주하는 집은 사백여 년 전 터 잡은 순흥안씨 핏줄기 두 집 포함 네 집, 나머지는 가끔 오가며 생홀아비 숨 냄새 풀풀 날리는 도시 사람들, 소음에 밀려온 고요에 가슴 뻥 뚫린다며 지상천국이란다 눈 쌓인 날이면 흉터 없어진 내리막길 원래 모습 되찾으며 미끄러지듯 올린다 졸업 머지않은 네 명 아랫마을까지 눈 치우고 나면 녹초, 찐빵집에서 뿜어내는 수증기처럼 머리통에서 모락모락 김 피워 올린다 주막거리에서 막걸리 한 양
시캐는 농부(시인 안원찬)
안원찬
2020.09.09 1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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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당은 풀들이 점령하고 있다봉당에 누워 있는 왜낫 달빛을 베고 있고헛간에 걸려 있는 호미는 허공을 매고 있다마루에 볕이 들어와 머물다 가고눈보라가 들어와 울다 가고뒷마루에는 밤나무 그늘 들어와 산다
시캐는 농부(시인 안원찬)
안원찬
2020.09.02 1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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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산터 길목 동네 어르신으로 불리는 밤나무가 있다 갈라지고 들뜬 흙색 수피를 보아 족히 백 살은 넘었을 것이다 유월이면 진동하는 수꽃 내에 감전된 여인들 콧구멍 실룩거린다 팔라당팔라당 날리는 이파리들, 유아들 탈 없이 잘 자라도록 가시 옷 입혀 무럭무럭 키운다 양수 없이 붉은 알밤 울컥울컥 토해내면, 이웃 댕댕이들 허공 북북 찢어대며 컹컹 짖고, 다산으로 수척해진 근골 비 햇살 바람에 매 맞은 잎들 흙으로 돌아가 깊은 안식에 든다
시캐는 농부(시인 안원찬)
안원찬
2020.08.26 1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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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십이 년 만에 귀향한 긴밭들도회지 불빛에 쫓겨 밀려온 어둠과 고요 빼곡하다건너 주막에서 아슴아슴 새어 나오는 불 빛만 아련하다막걸리 마시러 가려면 돌부리에 넘어지거나곡식을 짓뭉개거나 도랑에 빠지기 일쑤다그런 날은 별 꽃들이 현란하다그 꽃들 자박자박 내려와 수런수런 이야기하는 날이면풀벌레 울음소리 밟힐까 제대로 다니지 못한다소음 어둠 고요들이 내 몸속을 수없이 드나든다하지만, 끝내 공간을 지키는 것은 어둠과 고요라는 것나뒹굴다 제풀에 지치는 소음 어둠과 고요 이긴 적 없다최종적 승자는 밤 가시처럼 까슬까슬한가을 햇살까지 죄다 삼켜버
시캐는 농부(시인 안원찬)
안원찬
2020.08.19 1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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