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브내의 삼층석탑들(1)
너브내의 삼층석탑들(1)
정탄(町畽) 조원섭의 향토문화 보고서
지역학 연구 이야기로 보는 홍천③
  • 더뉴스24
  • 승인 2019.01.12 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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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가모니의 열반 후 제자들은 유해를 당시 사회의 풍속에 따라 다비(茶毘)를 하였다. 이때 인도의 여덟 나라에서 이 사리를 차지하기 위한 쟁탈이 일어나게 되자 도로나(徒盧那)의 의견에 따라 불타의 사리를 똑같이 여덟 나라에 나누어 주어 각기 탑을 세우니, 이를 ‘분사리(分舍利)’ 또는 ‘사리팔분(舍利八分)’ 이라고 하였다. 이때부터 사리신앙이 싹트기 시작하였으며, 이로써 사리를 보관하기 위한 불탑이 등장하게 된다.

최초의 탑은 반구형(半球形)이었으나, 후대로 내려오면서 그 밑에 높은 기단을 만들어 탑신을 받치고, 상륜(相輪)의 수효가 늘어나는 한편 주위에 돌난간을 둘러 아름다운 조각을 새겨 장식하였다. 시대가 내려갈수록 점차 기단부, 탑신부, 상륜부의 세 부분으로 구성된 전형적인 탑형식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우리나라의 탑파의 건립 경로는 중국을 거쳐 4세기 후반에 시작되었다. 그러나 탑의 양식은 인도, 중국과 다른 독특한 특징을 가지며 이루어졌다. 우리나라에서는 초기에는 중국의 고루형(高樓形) 목탑양식을 모방한 누각형식의 다층목탑이 건립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삼국시대 말기에 이르러 백제지역에서는 목탑을 모방한 석탑이 비롯되고, 신라에서는 전탑을 모방한 석탑에서 시작된다.

통일신라시대 초시에는 상하 기단의 옥개받침, 추녀 끝이 약간 들이는 특징 등 석탑양식의 전형이 성립된다. 8세기에 이르면 하층기단의 탱주가 둘로 줄고 탑신과 옥개석이 하나의 돌로 만들어지는 등 축소현상이 나타난다. 8세기 말부터는 규모도 더욱 작아지고 간략화되는 반면 조각솜씨가 정교해져 표면에 불보살 등의 장식문양이 조각된다.

9세기경에는 조각장식이 더욱 유행하여 불국사 다보탑과 같은 이형(異形)양식의 석탑이 조성된다. 또한 옥신석에 감실을 설치하거나 화강암을 사용하는 등의 독특한 개성을 보이기도 한다. 현재까지 조사된 우리나라의 탑파는 1,000기 이상을 헤아릴 수 있는데, 건조한 재료에 따라 목탑(木塔), 전탑(塼塔), 석탑(石塔), 모전석탑(模塼石塔), 청동탑(靑銅塔), 금동탑(金銅塔)이라 부르고 있다.

우리 홍천에도 신라시대, 고려시대에는 많은 사찰이 있었을 것이다. 그 이유는 보물문화재 3점, 강원도 문화재자료 3점 등 삼층석탑이 많이 산재되어 있는 것이 그 증거이며 공작산의 수타사(水墮寺)를 비롯하여 금학산 용수사(龍水寺), 옥수암(玉水菴), 관음사(觀音寺), 장락사(長樂寺), 성방사(城方寺), 쌍계암(雙溪菴), 은적암(隱寂菴) 등이 주요지리지에 나타나 있는 것이 이를 뒷받침 하고 있다. 이에 홍천지역의 삼층석탑들을 2회에 거쳐 소개하고자 한다.

희망리 삼층석탑(보물 제 79호) 홍천군 의회 앞

희망리 삼층석탑(보물 제79호)

이 탑의 현재 모습은 시멘트로 다져진 높은 바닥물위에 널찍한 돌 2장이 놓여있고 그 위로 기단과 탑신부가 있는 상태이다. 기단 가운데의 각 모서리에 기둥모양을 새겨 놓았으며 가운데에도 기둥조각을 두었다. 탑신부는 각 층의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하나의 돌로 이루어져 있는데 몸돌마다 모서리에 기둥모양을 조각하였다. 

안타까운 것은 3층의 몸돌이 없어져 위층으로 가면서 줄어드는 비율을 뚜렷하게 관찰할 수 없다는 것이다. 지붕돌 밑에는 모두 4단씩의 받침을 새겼다. 지붕돌이 두껍지는 않지만 네 귀퉁이 끝 부분의 치켜 올림이 적어서 날렵한 느낌은 없다. 이 탑은 탑신에 비해 기단부가 너무 크게 조성되어 비례가 맞지 않고 마치 탑신이 기단부의 첨가물 같은 느낌을 주고 있다. 각 부의 조각에 있어서도 약화돤 모습이 보여 고려 중기 이후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원 위치는 홍천초등학교 뒤쪽이었으나 1949년 홍천교육청으로 이전 하였다가 1957년 6월 현재의 자리인 홍촌군 의회 앞에 이전 복원하였으며 홍천초등학교 주변에 있던 석화산 관음사의 석탑으로 추정된다.

괘석리 4사자 삼층석탑(보물 제 540호) 홍천군 의회 앞

괘석리 4사자 삼층석탑(보물 제540호)

이 탑은 2단의 기단위에 3층의 탑신을 올린 형태로 4마리의 돌사자가 있어 4사자 석탑이라 부르고 있다. 아래층 기단의 각 면에는 안상이 조각되어 있는데 그 안에 꽃무늬 조각이 장식되어 있어 고려시대의 특징이 잘 담겨져 있다. 위층기단에는 각 모서리에 돌사자 1마리씩을 두어 넓적한 윗돌을 받치게 하였는데 이 탑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다. 이 사자들이 둘러싸고 있는 중앙의 바닥과 천장에는 연꽃받침대가 놓여 있어 불상을 안치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탑신부는 몸돌과 지붕돌을 각각 하나의 돌로 새겼다.

지붕돌은 밑면에 3단의 받침을 새겼고 가파른 경사면 탓인지 얇고 밋밋하다. 네 귀퉁이는 살짝 젖혀져 뾰족하다. 탑의 꼭대기에는 머리 장식으로 네모난 노반만 남아 있다. 전체적으로 곳곳에 파손된 부분이 있고 닳은 흔적이 보이나 대체로 본 모습을 잘 갖추고 있다. 기단에서 보이는 안상 조각수법과 돌사자, 연꽃받침 및 지붕돌의 3단 받침 등에서 고려시대의 양식이 물씬 풍긴다. 사자를 탑신 밑에 고였다는 점에서 특이한 수법인 고려후기의 작품이다.

이 탑에 조각된 4사자는 다른 4사자탑과 비교해 세련되지 않고 사자의 표정도 기개가 나타나기보다는 익살스러워 보인다. 가슴에 달고 있는 방울이 두드러져 사자라기 보다는 개처럼 보여 친숙한 느낌이 든다. 사실 방울은 불전 수호를 목적으로 달아 놓은 것인데 무당이 굿을 할 때 방울을 흔드는 것과 같은 이치이며 화엄사 4사자삼층석탑 사자도 방울을 달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원래 두촌면 괘석리에 있었으나 1969년 현재의 위치로 이전 복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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