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천읍과 내촌면, 동면, 도관리에서 만세시위
100년 전 4월1일부터 11일까지 만세집회 이어져

100년 전 3.1만세 운동의 유래와 홍천에서 독립을 위해 군민들이 분연히 일어난 1919년 기미년 4.1만세운동을 되짚어 본다.

먼저 3월1일 일어난 독립만세의 단초가 됐던 사건이 있었다.

같은 해 2월8일 일본 동경유학생들의 중심으로 독립선언서를 작성해 각국 대사관 및 일본 정부, 의회, 언론 등에 배포 한 후 11명이 서명한 독립선언서를 일본의 중심인 동경(조선지독교청년회관) 한가운데서 낭독해 3.1 만세운동이 촉발됐다.

그해 1월21일 고종황제가 67세를 일기로 덕수궁 창녕전에서 붕어하자 3월3일 인산일(장례일)로 결정됐다. 당시 동학혁명의 전신인 천도교, 기독교, 불교 지도자들 48인(33인만 대표로 서명)은 인산일인 3월3일로 독립만세운동을 계획했지만 많은 사람들이 몰리는 인산일에 사람들이 다칠 것을 우려, 3월1일로 다시 결정하고, 독립선언서 선포장소도 탑골공원에서 태화관으로 옮겨 독립선언문을 발표 한 후 33인은 일본 경찰서를 찾아가 자수하고 그 자리에서 연행됐다.

홍천읍 3.1만세 기념비
홍천읍 3.1만세 기념비

그 시간 탑골공원에서는 학생 대표자들의 중심으로 독립선언서를 발표하고 만세운동과 시위행진을 실시해 만세운동이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그렇게 3월1일 시작된 만세운동은 4월말까지 전국에서 들불처럼 일어나 1542회 200만여 명이 참가했으며, 이 가운데 7509명이 사망하고 1만5961명이 부상당했으며, 4만6948명이 검거되고, 건축물로는 교회 47개소, 학교 2개소, 민가 715채가 소실되는 비극을 겪었다.

서울에서의 3.1만세운동 이후 벌어진 홍천의 만세운동은 4월1일부터 11일까지 홍천읍(당시 홍천면), 동면 속초리, 내촌면 물걸리, 도관리에서 전개됐으며, 총인원 5000여명의 가담했고 그 중 10명 사망, 20여명 부상, 100여명이 투옥돼 고초를 겪었다.

이에 오는 4월1일 기미년 만세운동 100년을 맞아 홍천에서 벌어진 격렬한 만세운동에 대해 알아보고 유적지를 소개한다.

4월1일, 홍천읍 기미년 만세운동

북방면 능뜰 5인 의사 기념비
북방면 능뜰 5인 의사 기념비

주도자 오창섭(하오안리/천도교), 차봉철, 서상우(신장대리/감리교)는 고종인산 참례 후 만세운동을 계획하면서 33인의 서명이 독립선언서를 받고 장날인 4월1일 만세운동을 펼쳤다.

이날 활약한 사람은 원익상(감리교전도사/의병), 김현기, 김수완, 차태환, 박윤환, 이홍근, 송경섭, 정일규, 김영옥, 노동근, 신여균, 전원봉, 최승혁, 김복동, 한용섭 등이며, 500여명(도로공사장 부역인부 포함)이 참여한 군민들은 장터에서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외치며 일본군에 저항했다. 이 과정에서 군민들은 군청, 면사무소로 진출해 도망가려는 군수의 칼을 꺽고 팔을 비틀었다는 말이 전해지고 있다. 이날 만세운동으로 33명이 검거(일본 측 기록)됐으며, 유적지로는 북방면 능평공원에 5인 의사 기념비가 있다.

4월2일, 동면 속초리 유혈 만세시위

동면 속초리 민병숙, 민병태 선생 묘

주도자인 민병숙(고종인산참례)이 4월2일 속초리 면사무소 주변(동화중/속초소학교)에 1000명(2일간 총 2000명)이 모여 태극기를 손에 들고 만세운동을 펼치며, 홍천 만세운동 검거자 석방을 위해 홍천읍으로 진출을 시도했다.

하지만 면사무소 직원에 의해 이날 시위는 무산되고, 3일 재집결해 다시 홍천읍으로의 진출을 시도하면서 일본군과 격투를 벌였지만, 일본헌병의 총에 의해 민병숙, 민병태가 사망하고 수십 명이 검거됐다. 유적지로는 동면 성수리에 민병숙, 민병태 선생의 묘가 있다.

4월3일, 내촌면 물걸리(동창)만세운동

내촌면 물걸리 기미만세상

주도자 김덕원(천도교 장두), 전성열(부장두), 전영균, 이문순 등 천도교인이 중심이 되어 4월 3일 내촌면 물걸리에서 5개면(내촌면, 기린면, 화촌면, 서석면, 두촌면)1000여명(일제 측 400여명)의 인원이 참여해 만세운동을 벌였다. 이날 만세운동을 목격한 사람들은 수천 명에 이른 것으로 알려진다.

만세일 전날 도관리 헌병주재소 헌병 7명이 출동해 8명(이순극, 전영균, 이기선, 이여선, 김자희, 전기홍, 양도준)이 사망하고 20여명이 부상당했으며, 10여명이 검거됐다.

이후 사망한 8명은 팔열사로 불리며 물걸리 기미만세공원에 팔렬사비를 세웠다.

도관리 횃불(봉화)시위

4월11일, 도관리 횃불(봉화)시위일은 내촌면 도관리(당시 면 소재지)에서 일어난 만세 시위로 주도자는 미상이나 천도교인 감리교인이 주도했으며, 참여인원은 50여명(일제 측)으로 기록되고 있다. 그러나 유적지는 남아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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