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앙마이’여행을 하면서 느낀 점 하나를 공유하고자 합니다. 묶인 코끼리와 갇힌 새가 행복한들 얼마나 행복할까 하는 것입니다.

그곳, “매땡 코끼리학교”에서 코에 끼워준 붓으로 코끼리가 그림 그리는 과정을 직접 보니 참으로 놀랍습니다. 코끼리가 이정도로 그림을 그리려고 하면 얼마나 가혹한 훈련이 필요했을까? 엄청난 힘을 지닌 코끼리를 이처럼 순종토록 만들기 위해서는 우선 무력으로 제압을 해야 하는 기본단계를 거칩니다. 그런 후에 당근과 채찍을 반복하여 사용합니다.

언젠가 코끼리 훈련과정이 TV에 적나라하게 방영된 적이 있는데, 거의 실신하거나 자포자기를 하는 수준까지 생명의지와 자유의지를 말살시킵니다. 쇠갈고리로 예민한 부분을 계속 찔러서 실제로 피가 철철 흘러 넘치는 고통을 무자비하게 가하는 겁니다. 그리고 복종할 때마다 먹을 것을 아주 조금씩 줍니다. 그래서 스스로가 한계와 무력감의 자물통에 묶이게 되는 거지요.

실제로 보니까, 쇠사슬에 묶여 있는 말뚝을 뽑을 힘이 있어도 거기에 묶어만 놓으면 자기한계 인식 때문에 포기한다고 합니다. 한마디로 말을 잘 듣도록 코끼리의 겉모양만 남겨둔 채 본래 타고난 성향과 의지를 꺾어버린 거지요. 그 후에도 트라우마의 원흉인 이 쇠갈고리를 코끼리 다루는 사람손에서 놓지 않습니다.

사람처럼 잔인하고 영악스러운 동물이 또 있을까요?

만물의 영장이 되는 기준이 잔인함과 이기적인 욕심까지 포함되는 것일까요?

동물들은 배고프지 않으면 먹잇감이 옆에 있어도 잡아먹지 않는다는데, 사람은 당장 배고프지 않아도 오락을 위해서, 돈벌이를 위해서 또는 먹지도 못할 알량한 명예를 위해서 다른 생명을 죽이고 있는 현실이 본래부터 자연스러운 것일까요?

더욱이 이런 못된 짓을 사람에게까지 하고 있다니요. 반항하지 못하도록 교묘하게 위협하고, 보이지 않는 술수와 아전인수의 제도를 만들어서 코끼리 발목에 쇠사슬을 채우듯 묶어 놓고, 앞날을 예상해서 잔꾀를 부리며 양분을 빨아먹는 하이에나 같은 존재들이 실제로 있다는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자기의지의 실현을 위해서 보편적으로 수용할 수 있는 정도를 넘어 남을 지나치게 규제하려고 하는 것은 사악한 이기심입니다. 숭고하게 보호되어야 할 한 가정의 울타리를 좀먹거나 남의 가정위에 군림하려는 그 어떤 제도나 사상이나 종교도 악입니다. 코끼리에 쇠사슬을 채우고 갈고리로 위협하는 것이나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내가 좋아하는 것은 남도 좋아하듯, 내가 싫어하는 것은 남도 싫어하기 마련입니다. 우리가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한다는 것은 사실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내가 싫어하는 것을 남에게 강제하지 않는 것은 어느정도 가능한 일입니다.

남이 하면 불륜이고 내가 하면 로맨스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어쩌면 정신병원에서 보호받아야 할지도 모르겠네요. 내가 싫어하는 것은 남도 싫어한다는 것을 모르는 바보니까요. 혹 바보가 아니라면 철면피 아닐까요? 어떤 경우에도, 지극히 이기적인 사람이 존경받아서는 안됩니다. 나만 속는 게 아니라, 남도 속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내가 싫어하는 것이 무엇인지 곰곰히 정직하게 헤아려보면 저 역시 코끼리 발목에 쇠사슬을 채운 죄인이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점(利點)을 헤아려가면서 부지불식중에라도 남을 괴롭히는 일을 하지 않기 위해 늘 깨어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주지는 못할 망정 빼앗지는 말아야 할 테니까요.

코끼리가 자기 이름을 SUDA라고 그림에 썼다고 관광해설자는 설명하고 있지만, 과연 그 코끼리가 그것을 글씨라고 생각하고 그려냈을까요? 그것이 코끼리의 삶에 무슨 가치를 부여할까요?

어미 곁에서 좋아하는 어린 새끼 코끼리 발목 역시 쇠사슬로 채워져서 시멘트 기둥에 묶여 있는 모습을 보며 “자유(自由)가 얼마나 소중한 가치인지를 다시금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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