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는 바와 같이, 사람이 볼 수 있는 빛은 한정되어 있는데 이를 가시광선(可視光線)이라고 하지요. 사람이 들을 수 있는 소리도 한정되어 있어서 이를 가청음(可廳音)이라 하구요. 가시광선은 수많은 빛 가운데 극히 일부이고, 가청음도 역시 수많은 소리가운데 극히 일부라는 사실은 관련분야 과학자들이라면 모두 잘 알고 있는 기본 상식입니다. 이처럼, 종류가 다른 짐승들마다 각각 들을 수 있고 볼 수 있는 범위가 역시 다르기 때문에, 어떤 짐승들은 지진이나 쓰나미의 징후를 미리 포착하고 안전지대로 대피하는 것 아니겠어요?

그런데 사람이 들을 수 있는 가청음과 볼 수 있는 가시광선 마저도 평상시엔 잘 인식하지 못하지요. “눈 뜬 장님”이란 말처럼 보고 들으면서도 무심하게 지나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경이 어디에 집중되느냐에 따라서 인식의 정도가 달라지니까요.

복잡한 거리에서 잃어버린 어린 자식이 “엄마~~~~” 하면서 우는 소리는 그 자식을 애타게 찾고 있는 엄마가 가장 잘 알아듣지 않나요? 그런 가하면 지하철을 타고 딴생각에 몰두할 땐 안내방송을 놓쳐서 내려야할 정거장을 지나치는 경우도 있지 않던 가요?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열려있는 행복도 거기에 집중하지 못하면 잘 보이지 않아요. 일등급 한우고기를 먹어도, 걱정이나 불안에 매몰되어 있거나 너무 바빠서 허겁지겁 먹는다면, 고유한 일등급의 고기맛을 느끼지 못한 채 그저 삼켜버리는 것처럼 말입니다.

사실,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은혜, 행복의 문은 엄청나게 준비되어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어디에 집중하느냐에 따라 보이는 행복의 문은 한정되어 있지요. 끝없이 비교하거나, 속도만 내는 사람은 그걸 일단 멈춰보세요. 그래야 자기 자신을 에워싼 가장 가까운 행복의 문들을 찾을 수 있어요.

같은 논리로, 닫혀 버린 행복의 문에만 시각이 고정되어서 한없이 아쉬워하고 만 있다면, 바로 그 옆에 열려있는 또 다른 행복의 문은 내 눈에 들어올 리가 없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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