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억원 예산 투입한 홍천군지 오류..책임은 누가지나

홍천군이 1989년에 이어 27년만인 지난 2018년 4억원을 투입해 홍천군지를 발행했다. 그러나 군지 발행에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필진으로 참여했지만, 총체적 오류로 집필해 논란이 일고 있다.

홍천군지(洪川郡誌)는 홍천의 기록이며 역사이다. 당시의 시대상을 그대로 기록해 놓아 후대에 역사서가 된다. 옛날로 치면 읍지(邑誌)이다. 홍천의 역사는 대표적으로 『신증동국여지승람』, 『여지도서』, 『홍천현읍지』, 『관동지』, 『홍천현지』, 『대동지지』, 『관동읍지』, 『화산현지』, 『홍천현 읍지』, 『홍천군읍지』, 『강원도지』 등에 기록되어 있다.

홍천군지(洪川郡誌)의 역사적 오류

도덕리가 없는데 있다고 표기했다.

2018년 홍천군지 중권 삶과 문화편 중 제1장 인문환경 (3) 두촌면(斗村面) 39P를 보면, “장남리는 인제군과 경계를 이루는 마을이다. 건니고개 아래는 원거리·강지나뭇골·장사랑이·도덕골 마을이 있다. 남덕골은 남양 홍씨가 덕을 베풀고 살았다 하여 붙여진 마을로 『여지도서』에 도덕리라고 기록하고 있으며, 강원도 옥수수시험장이 있다.”라고 표기했다.

그러나 『여지도서』는 1757년(영조 33)∼1765년에 각 읍에서 편찬한 읍지를 모아 만든 공식적인 전국 읍지 모음집이다. 때문에 역사학자들이 꽤나 인용하는 지리서이다. 『여지도서』가 발행될 당시 지금의 두촌면은 말촌면으로 기록되어 있고, 말촌면에는 철은정리와 자음리만 기록되어 있다. 『여지도서』에 도덕리는 없다.

“末村面 哲隱亭里自官門東北間距四十五里編戶一百五男二百十二口女一百四十五口 自陰里自官門東北間距六十里編戶九十四男一百四十三口女九十口”

“말촌면 철은정리는 관아에서 동북쪽 45리이다. 호적으로 편성된 민가는 105호이다, 남자 212명이며, 여자 145명이다. 자음리는 관아에서 동북쪽으로 60리이다. 호적에 편성된 민가는 94호이다. 남자는 143명이며, 여자는 90명이다.”

말촌면이 두촌면으로 이름이 바뀌고, 도덕리가 등장한 것은 『홍천현읍지(규장각 소장, 발행 연대 미상』, 『관동지(1829년∼1831년』부터다.

서석면의 법정리는 8개인데 7개로 표기

홍천군지 중권 삶과 문화편 중 제1장 인문환경 (5) 서석면(瑞石面) 소개에서 42P “면 소재지는 풍암리다. 검산·풍암·생곡·어론·수하·군두·청량 등 7개 법정리를 관할하고 있다.”고 표기했다. 그러나 『홍천군지』 발행 시점인 2018년도 서석면의 법정리는 8개였다. 군두리는 상군두리, 하군두리로 각각 별도의 법정리이다.

여지도서에는 갈마곡리가 없는데 있는 것으로 표기

홍천군지 중권 삶과 문화편 중 제2장 산천의 지명유래 83P에 1) 홍천읍을 보면, “ 『여지도서』에 홍천읍은 현내면(縣內面), 지역으로 진리(津里), 희망동리(希望洞里), 갈마곡리(葛麻谷里), 태학리(太學里), 검유리(檢柳里), 동막리(東幕里), 연봉리(連峰里) 등 7개 지역의 위치와 호구가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여지도서』 홍천 방리에는 갈마곡리가 없다. 갈마곡리는 『여지도서』 이후 발행된 것으로 추정되는 『홍천현읍지(규장각 소장, 발행 연대 미상』에 비로소 등장하는 마을이다.

‘진리에서 신장대리 닥바우로 가는 나루터’는 잘못된 문장. 닥바우는 신장대리가 아닌 갈마곡리에 있는 바위이다.

홍천군지 중권 삶과 문화편 제3장 읍면별 지명유래 중 117P, "(1) 진리(津里)소개를 보면, 진리-나루새 : 진리에서 신장대리의 닥바우로 가는 나루터. 부근에 군용(軍用) 비행장이 있었음. 1990년대까지 이 나루터를 중심으로 홍천의 5일장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진리에서 신장대리의 닥바우로 가는 나루터"? 홍천 읍내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이해할 수 없는 문장이다. 이 문장대로라면 홍천강 북쪽 강변에 나란히 붙어있는 진리와 신장대리를 나룻배로 이용해 왕래한다는 얘기다. 닥바우는 신장대리가 아닌 갈마곡리에 있는 바위이다. 이쯤 되면 필자가 홍천의 역사는 물론 현재의 홍천도 모르는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조차 든다. ‘홍천군’라는 명칭이 부끄러워진다.

이 외에도 251P 성동리에 있는 대룡저수지를 상화계리에 있는 큰 저수지로 소개하는 등의 자잘한 오류는 일일이 지적하기도 버겁다.

『홍천군지』는 군에서 인증한 홍천에 관한 공식기록이다. 군지는 동시대를 사는 홍천군민에게는 자긍심이며, 후손에게는 고향의 역사이다. 한번 잘못된 기록은 대물림처럼 이어진다.

홍천군지 상권에서 다시 한 번 오류

『2018 홍천군지』 상권에서 자연과 역사 455P 3. 누정 소개에서 1) 범파정에 기록된 내용이다.

범파정은 「홍천읍 갈마곡리에 위치하고 있었다고 전한다. 『강원도지』에는 ”객관 앞에 있다. 지금은 없어졌다“고 간략히 기록하고 있다 ‘홍천현읍지’에 ”가정(嘉靖) 연간에 현감 노연(魯延)이 창건한 정자로 효종 무진에 현감 김만춘(金萬春)이 중 했고, 도광(道光) 9년 기축년에 현감 한여(韓璵)가 개건하였다“고 한다.」 라고 소개하고 있다.

그러나 위 표기된 문장에서 3개의 역사적 오류와 1개의 혼란이 발견된다.

『홍천현읍지』라는 이름을 가진 읍지는 2개다. 첫 번째 홍천현읍지는 규장각이 소장하고 있는 『洪川縣邑誌(발행 연대 미상』이고, 두 번째 홍천현읍지는 백원정사 필사본인 『洪川縣 邑誌』이다.

통상 두 읍지를 구분하기 위해서 규장각 소장, 백원정사 필사본을 함께 표기한다. 혹은 각각의 표지에 기록한대로 띄어쓰기로 구분하기도 한다. 무엇이 되었건 구분을 해주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두 읍지의 발행연대, 기록 내용이 전혀 달라 큰 혼란을 불러올 수 있다.

『2018 홍천군지』에서 인용한 백원정사 필사본 『洪川縣 邑誌』의 범파정 기록의 원문을 살펴보자. 『洪川縣 邑誌(백원정사 필사본)』 - “泛波亭 在縣東二里 嘉靖間縣監魯延岭所創 本朝孝宗戊辰間縣監金萬春重修 道光九年己丑縣監韓璵改建“

홍천현읍지를 구분하지 못한 것은 둘째 치고 인용한 원문조차 틀렸다. 원문에는 범파정을 만든 이를 노연이 아닌 노연령으로 기록하고 있다. 홍천현감 중 노연은 없다.

다른 홍천읍지와 비교 분석을 하면 문제는 더욱 심각해진다.

『화산현지(花山縣誌/일본 오사카부립 나가노시마도서관 소장)』의 범파정 기록은 아래와 같다.

“泛波亭 ~ 중략 ~ 嘉靖間縣監魯延岭所創 本朝孝宗戊戌間縣監元萬春重修”

『홍천군읍지(洪川郡邑誌)』 범파정에 관한 기록은 아래와 같다.

“泛波亭 ~ 중략 ~ 嘉靖間縣監魯延岭所創 本朝孝宗戊戌間縣監元萬春重修 今廢”

효종의 재임기간이 1649년~1659년이니 무술년은 1658년이다. 1658년 당시의 홍천현감은 김만춘이 아닌 원만춘이다.

원만춘은 1658년의 2월 20일 홍천현감으로 부임해 1661년 3월 11일 퇴임했다. 내용이 틀린 『홍천현읍지(洪川縣 邑誌/백원정사 필사본)』을 인용했으니 무술년을 무진년으로, 원만춘을 김만춘으로 기록했다. 무진년은 1628년과 1688년이니 효종 재위기간에 무진년은 없었다. 기본적인 사실관계를 확인했다면 이런 어처구니없는 오류는 피할 수 있었다.

『홍천군지』 전체를 세세하게 살피지 않고 관심 있는 분야를 짧은 시간에 흩어본 것만으로도 이런 오류를 발견했다.

홍천군지를 오류투성이로 만든 집필자는 부끄러워해야 한다. 앞으로 홍천군의 역사를 논하는 자리에서는 스스로 나서지 않는 게 역사학자로서 자세이고 태도이다.

 잘못된 역사기록과 예고되는 실수는 바로 잡아야 한다. 누군가는 지적하고, 누군가는 수정하고 누군가는 경계해야 한다. 아울러 시급한 것은 개정판을 내는 것이다. 잘못된 기록을 그대로 둘 수는 없다. 홍천군의 귀중한 혈세로 후손들에게 잘못된 역사를 물려주고, 일그러진 홍천을 물려줄 순 없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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