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내면의 소리를 있는그대로 들어보기

울고 싶을 땐 펑펑 울어라~

춤추고 싶을 땐 내 몸이 하자는 대로 흔들어라~

때로는 내 마음이 가는 대로, 내 몸이 요구하는 대로, 정직하게 헤아려 귀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고 묻지도 말고, 주위의 시선에 너무 눈치도 보지 말고~, 몸이 아픈 것은 관심을 가져 달라는 긴급한 몸의 신호입니다. 마음이 괴로운 것은 애매한 억울함 속에 있는 나 자신을 이해 받고 싶다는 마음의 갈증입니다.

꽤 오래전 일입니다. 심성수련 전(前)단계 체험과정에 초대된 경험이 있습니다. 온갖 상념과 적체된 관념을 내려놓기 위해, 생각할 겨를도 없이 쓰지않던 근육운동을 땀이 나도록 격렬하게 한 다음, 깊은 명상과 함께 불편한 몸 부위의 감각을 느끼면서 스스로를 위로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가슴에 맺혀 있는 내면의 화(火)를 달래는 시간이었지요.

내게도 평상시 남자라는 이유로 마음 놓고 표현할 수 없었던 내면의 억울함과 서러움이 그토록 많이 쌓여 있는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심신을 파고드는 음악이 가슴에 자극을 주는 바람에 그냥 그렇게 복받쳐 울었습니다. 함께 참여한 다른 사람들도 모두가 한결같이 남의 시선을 의식할 겨를이 없었기에 그런 식으로 마음 놓고 펑펑 울어볼 수 있었습니다. “그동안 너무 서러웠지?” “그동안 너무 외로웠지?” “그동안 너무 답답했지?” “그동안 너무 억울했지?” “진정, 내가 나를 위로하고 나를 사랑하지 못했구나!”

현 시대의 아버지들은 나처럼 울 장소가 없어서 슬픈 사람들임을 다시금 느꼈습니다. 내가 무슨 동기에 이끌려 여기까지 바쁘게 살아왔던가? 내 몸과 마음이 지금 절실히 요구하는 것은 진정 무엇이란 말인가? 그 시간만큼은 나 자신이 주인공이 되어서 주인공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 보았습니다. 일종의 카타르시스(catharsis) 효과겠지만, 그날 밤은 습관처럼 한밤중에 깨였다가 다시 잠들었던 평상시와 달리 단숨에 새벽까지 단잠을 잘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몸도 마음도 가벼운 아침을 맞았습니다.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관념은 믿을 게 못 된다는 것을 깨달었습니다. 명백한 사실(fact)조차도 보는 이의 관점에 따라 또는 이해관계에 따라 천차만별로 다르게 보이고 다르게 해석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보는 대로 생각하기 보다 생각하는 대로 보기 때문입니다. 태어날 땐 없었던 정보들이 점차 뇌속으로 들어와 쌓이고, 그 축적된 정보들이 시시비비(是是非非) 분별지심(分別之心)의 기준이 되어, 어느새 나의 주인이 되어버렸기 때문입니다.

부부싸움은 칼로 물베기인지라 하루에 풀어진다고 하고, 정치이념 대결의 끝은 30년이 걸린다고 하고, 종교적인 진리의 싸움은 천년이 걸려도 끝이 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요즘은 하루에 풀어지는 부부싸움이 어렵다고 합니다. 30년 지나도 정치적 화해가 쉽사리 이루어 지지 않습니다. 종교 간의 진리대결은 아직도 진행중이고~

왜 그럴까요?

모두가 선악판단기준에 노예가 되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 시비심이 목숨보다 앞서고 화목보다 앞서고 사랑보다 앞서기 때문입니다. 왜곡된 이치관념이 갈수록 더욱 공고화되어 신앙처럼 되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네 편 내편만 보이는 흑백 색맹이 되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고집이 극에 달한사람은 하늘도 못 말리는 사람입니다. 인류의 화평과 사랑을 보편적 가치로 내세우는 종교 간에 대화가 다른 대상보다 더욱 어렵다는 것은 분명한 모순입니다.

내 마음이 괴로운 것과 관념적 진리와 무슨 갑을 관계가 있다는 말인가요? 몸이 아파도 남자는 울면 안된다는 강요된 관념이 진정 하늘의 굳건한 진리인가요?

하늘이 주신 몸과 마음의 원초적 느낌을 각색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느껴야 합니다. 온전치 못한 관념들이 그런 것들을 억누르고 감금하도록 방치해서는 안될 겁니다. 언젠가 주위 환경이나 심신이 취약해질 때는 그야말로 호미로 막을 것을 포크레인으로도 막지 못하는 상황을 직면하게 될지도 모르니까요.

울고 싶을 땐 펑펑 울어라~

웃고 싶을 땐 우아함 보다 바보처럼 거침없이 웃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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