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탄(町畽) 조원섭의 홍천 향토문화보고서
홍천읍 삼마치리 마애선정비
장전평 옥류동 암각명, 홍천화산심상소학교 정문

지난 여섯 번째까지는 홍천읍 금석문 24기중 연봉리선정비군 16기, 홍천박물관내의 홍천현감 원만춘 청백선정비 그리고 홍천향교 입구의 3기〔하마비, 군수 이낙응기념비, 홍천향교 보수기념비(추정)〕에 대하여 소개하였고 금번 일곱번째에는 홍천읍의 마지막으로 삼마치의 마애선정비 2기, 장전평의 옥류동천 암각명, 홍천화산공립심상소학교정문을 소개하기로 한다.

홍천읍 삼마치리 75번지 옛 국도변(주유소 뒤쪽) 벌통 밑 자연석에는 2기의 마애선정비가 위치하고 있다.

마애비(磨崖碑)라 함은 자연석에 글 또는 그림을 새겨 놓은 것을 말하는데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몰라도 홍천군 문화유적을 소개하는 문헌(홍천군의 역사와 문화유적, 홍천군의 문화유적분포지도, 홍천군지 등)에도 마애선정비를 소개한 적은 없었다.

홍천군 금석문 74기를 정리하던 중 마애선정비에 관한 기록과 현장을 확인하고 소개하게 되었다.

2014년 홍천문화원에서 발간한 벌력문화 제28호에 홍천문화원 향토문화연구소 허림(병직)연구위원이 『홍천 삼마치리 《현감 홍공택보 청덕애민영세불망비》2』를 발표하여 알려지게 되었으며 이때에도 마애선정비 2기중 1기만 발표하였었다. 현감 홍택보 청덕애민선정비를 확인하던 중 그 왼쪽에 또 하나의 음각문이 발견되었는데 그것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필자는 인터넷을 검색하던 중 그것은 홍천현감 이의장선정비라고 주장하는 닥밭골 심충성선생의 글을 확인하여 현재의 단계에서는 추정이지만 현감 이의장선정비로 아주 조심스럽게 소개하기로 한다.

사실 이 마애선정비는 삼마치리 주민들도 모르고 있었다. 도로가에 바위가 갑석처럼 툭 튀어나와 있어서 여름날 길 가다가 힘들면 쉬어가고, 비를 만나면 비를 피해 쉬어 가면서 장난삼아 돌 하나를 집어 던져 다행히 바위 사이로 들어가면 좋아하며 아들 낳는다는 아들바우 딸바우로만 알고 있었다.

이 도로는 홍천에서 횡성을 경유하여 원주감영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하고 있다. 옛날 홍천현감들도 원주에서 부임하며, 현감직을 마치고 원주감영으로 이임하며 지나는 길이었으리라.

삼마치리 2기의 마애선정비
삼마치리 2기의 마애선정비

마애선정비 2기중 왼쪽의 선정비는 현감 이의장의 선정비로 윗부분은 타원형(44cm)이고 아래부분은 약간 좁은(40cm) 사각형인데 글자는 세로로 3줄로 음각되어 있으나 심하게 마모되어 판독은 어렵다. 현감 이의장(李宜璋)은 홍천현읍지 읍선생안(邑先生案)에 의하면 제91대 현감으로 1704년부터 1707년까지 3년여 동안 현감직을 수행하였다.

한국역대인물종합시스템에는 자(字)는 봉경(奉卿)이며 본관은 용인이다. 甲午年(1654년/효종5년)에 태어나 숙종10년(1684년) 31세의 나이로 갑자식년시 진사3등에 급제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건립연도는 확인되지 않고 있으나 일반적으로 재임기간이 끝난 후인 1707년 이후로 추정된다.

현감 이의장선정비 오른쪽에는 사각형(가로 33cm, 세로 113cm)으로 글자는 세로로 한 줄로 음각 되어있는 현감홍공택보청덕애민영세불망비( 縣監洪公澤普淸德愛民永世不忘碑)로 제79대 현감으로 1683년부터 1688년까지 5년여 기간동안 재임하였다.

비교적 글자는 선명하여 판독은 가능하다. 건립연도는 확인되지 않았으며 일반적으로 재임기간이 끝난 후인 1688년 이후로 추정된다.

한국역대인물종합시스템에 의하면 홍택보는 자(字)는 시숙(施叔)이며 癸巳年(1653년/효종4년)에 태어나 30세일때 숙종8년(1682년) 임술증광시 생원3등으로 급제하였으며31세에 홍천현감으로 부임하고 본관은 남양으로 기록되어 있다.

홍천군지에 의하면 장전평리 암각서는 홍천읍 장전평리 산 9번지에 위치하고 있다.

5번 국도를 타고 홍천읍에서 횡성쪽으로 가다 성산터로 진입하는 마을길로 내려서 약 150m쯤 가면 옥류동 폭포가 나온다. 옥류동 폭포 입구의 오른쪽 바위에 길이 210㎝,너비 50㎝ 크기의 ‘옥류동천(玉流洞天)’ 이라는 큰 글씨가 음각되어 있다.  ‘옥류동천’의 뜻은 옥류동 폭포의 유래를 의미하는 것으로 하늘의 선녀[玉女]가 내려와 목욕을 했다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보통 ‘동천’이라는 암각명은 우리나라 경치 좋은 곳 바위의 암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이다. ‘동천’은 신선세계와 같이 아름다운 곳이라는 뜻이므로 ‘옥류동천은’ 옥류동 폭포의 경치가 빼어났기 때문에 음각한 것이다. 그리고 작은 글씨로‘임오초동(壬午初冬) 월남서(月南書)’라고 음각되어 있는데, 1882년 초겨울 남궁억선생과 처남매부지간인 월남 이상재선생이 쓴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장전평리 옥류동천 암각명
장전평리 옥류동천 암각명

그러나 필자는그러한 사실에 의구심을 품는다.

한서 남궁억선생은 1863년에 태어나 16세인 1878년에 남양양씨 혜덕과 결혼하고 21세인 1883년에 영어학교인 동문학에 입학하였으며 1939년에 사망하였다.

월남 이상재선생은 1850년에 태어나 1927년에 사망하였다. 강릉유씨와 결혼하였으나 사별하고 장순재와 재혼하였으며 1881년 박정양과 조선사찰단(신사유람단)의 일원으로 도일하였었는데 두 사람이 어떻게 처남 매부지간이라는 사실과 壬午年(1882년)에 “옥류동천”이라는 글을 어떠한 연유로 지었을까? (한서 남궁억선생의 고향이 홍천이 아니고 서울이며, 1882년은 월남 이상재선생과 만나기 전이었을 것이라는 추측과 월남 이상재선생이 홍천에 무슨 연유로 왔었을까 라는 생각) 홍천화산공립심상소학교 교문은 홍천읍 희망리 홍천초등학교 교내 화단에 위치하고 있다.

두 개의 사각뿔 모양의 화강암 기둥에 오른쪽에는 洪川花山公立尋常小學校로, 왼쪽에는 昭和六年男子卒業生寄贈으로 음각되어 있는데 학교연혁에 의하면  홍천화산공립심상소학교 명칭은 1937년 4월부터 1944년 3월까지 사용하던 교명으로 「六」자 앞의 구멍자리에 「十」자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어 건립연도는 소화16년인 1941년으로 짐작된다.

홍천초등학교는 홍천감리교회 역사에 의하면 1906년 홍천감리교회를 창립한 선교사 무스(J.R.Mouse)와 지역사회 인사 9명과 함께 광성의숙으로 지금의 홍천성당부근에서 개교하였다. 일제강점기 시절 홍천감리교회가 큰 위기를 맞아 일본 관헌의 억압으로 홍천보통학교에 교사(校舍)를 인계하였다.

현재의 학교위치로 이전한 것은 정확치 않으나 1920년 전후로 추정된다.1912년 10월 1일 홍천공립보통학교로 개칭하고, 1937년 4월 1일 홍천화산공립심상소학교로 개칭, 1944년 4월 1일 홍천화산공립국민학교로 개칭하고 1945년 9월 10일 8.15해방과 함께 홍천국민학교로 재 개교하였으며 1996년 3월 1일 홍천초등학교로 개칭되어 2021년 현재 개교 114년째을 맞고 있다.

홍천초교 전신 광석의숙 일제강점기 위치도(차주원 홍천향토문화연구소 연구위원)
홍천초교 전신 광성의숙 일제강점기 위치도(차주원 홍천향토문화연구소 연구위원)

홍천감리교회는 1908년 광성의숙을 창립하고 일제 강점기에 일본관헌의 억압을 견디지 못하고 홍천공립보통학교에 교사까지 넘겨주고, 1919년 기미만세운동 이후 교회가 급속도로 성장함에 따라 신장대리로 이전하여 예배당을 건립하고 강원도내 최초 여성교육기관인 정숙여학교를 개설하고, 6년후인 1927년 유아교육기관인 홍천유치원을 개원하여 한글교육을 통하여 민족정신을 고취하였으나 일제강점기 말무렵 정숙여학교 폐교, 홍천유치원 폐원이라는 어픔을 겪었으며 6.25한국전쟁이 휴전되고 1954년 강원도지사의 인가를 받아 재 개원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다음 여덟번째에는 화촌면과 두촌면 금석문에 대하여 소개하기로 한다.

 
저작권자 © 더뉴스24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