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대적이고 주관적인 홍천읍지 이야기 17

전 세계가 1년 넘게 코로나로 몸살을 앓고 있다. 14세기 유럽 인구의 20%가 사망했다는 흑사병(페스트)에 버금가는 혼란이다. 전염병은 늘 우리와 함께 했다. 가까이는 메르스(2015년), 신종플루(2009년), 사스(2002년)가 있었고, 괴질로 불린 콜레라는 당시 사망률이 40% 이상이었다. 모기로 감염되는 뇌염과 결핵균에 의한 결핵도 사람들을 공포로 몰아넣었다.

좀 더 거슬러 올라가 조선시대에도 전염병은 늘 공포의 대상이었다. 원인을 알 수 없기에 모두 역병(疫病) 혹은 돌림병이라 통칭했다. 두창, 성홍열, 장티푸스, 이질, 홍역 등 수많은 역병이 돌았지만 당시 의료 수준으로 치료가 불가능했다. 세균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던 탓에 전염병에 대한 진단도 사뭇 달랐다. 그중 하나가 억울하게 죽은 영혼이나, 주인이 없어 제사조차 받지 못하는 귀신이 퍼트린다고 생각했다. 이들을 달래야 했다.

왕이 나섰다. 이들에게 풍성하게 제사 음식을 차려 위로했다. 일년 중 4월 청명, 7월 보름, 10월 초하루 이렇게 3번 제사를 지냈다. 지방에서도 고을 수령이 제사를 지냈다. 이들에게 제사를 지낸 제단이 여단(厲壇) 혹은 여제단(厲祭壇)이다. 이에 관한 기록이 홍천읍지 사묘(祠廟)와 단묘(壇廟)에 남아있다.

사묘(祠廟)와 단묘(壇廟)에는 여단 외에에도 사직단(社稷壇), 문묘(文廟), 성황사(城隍祠) 혹은 성황단(城隍壇), 팔봉산사(八峯山祠) 그리고 간혹 향교(鄕校)까지도 포함한 기록이 남아있다. 한문만으로 해석하면 사묘는 제사를 올리는 사당 즉 지붕이 있는 건물을 말한다. 단묘는 제사를 올리는 단과 사당을 함께 의미한다. 단묘가 좀더 포괄적인 의미다. 시대에 따라 혼용해서 사용하기도 했다. 읍지에 따라 사묘 혹은 단묘로 기록했다.

사직단은 임금이 백성을 위하여 땅의 신(土神)과 곡식의 신(穀神)에게 제사를 지내던 제단이다. 지방에서도 관아의 서쪽에 사직단을 세우고 고을 수령이 제사를 지냈다. 문묘는 공자를 비롯하여 조선의 큰 선비들을 함께 모신 사당이다. 이들에게도 제사를 지냈다. 대개 향교 안에 있었다. 성황사 혹은 성황단은 서낭당이라고도 하며 서낭신에게 제를 지내는 제단이다.

성황사는 제사를 지낼 수 있는 건물이 있는 경우이고, 성황단은 건물없이 제단만 있는 경우이나 혼용해서 사용하기도 한다. 이와 별도로 성황당(城隍堂)은 관이 아닌 민간이 주도로 만들어진 것을 말한다. 서낭신은 토지의 부귀와 즐거움을 수호하는 신이다.

서울시 평창동에 있었던 여제단 자리를 알리는 표지석

앞서 말한대로 여단 혹은 여제단은 돌림병을 예방하고자 억울하게 죽은 사람이나, 주인이 없어 제사를 받지 못하는 외로운 혼령들에게 제사를 지내는 제단이다. 팔봉산사는 팔봉산에 있던 사당이다. 향교는 지방에서 유학을 교육하기 위해 설립된 관학 교육기관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여지도서』, 『홍천현읍지』, 『관동지』, 『관동읍지』, 『화산현지』, 『홍천현 읍지. 백원정사 필사본』, 『홍천현지』, 『홍천군읍지』, 『강원도지』 등에 기록된 사묘, 단묘에는 사직단, 문묘, 성황단, 여제단의 위치와 규모를 기록했다.

사직단은 현의 서쪽에 있었으며, 조선 초기에는 현으로부터 3리, 후기로 가면 현으로부터 5리에 있다고 적었다. 그 위치는 잣고개라고 지명을 기록하기도 했다. 잣고개는 홍천읍 희망리와 북방면 하화계리를 잇는 고개다.

문묘는 현으로부터 북쪽 1리에 있던 향교 안에 있었으며 규모는 홍천읍지마다 조금씩 차이가 난다. 『홍천현읍지』에서는 20칸 반으로 적었고, 『여지도서』에서는 30칸, 『관동지』는 12칸 반, 『홍천현지』에서는 34칸이라고 기록했다.

성황단은 현으로부터 서쪽 3리에 있다고 했다. 『관동읍지』만 성황단이 현의 북쪽 3리에 있다고 했다. 가장 최근 기록인 『홍천군읍지』와 『강원도지』에서는 각각 ‘군의 서쪽 3리쯤에 있다’, ‘군의 서쪽에 있다’고 기록했다.

여단(여제단)은 현의 서쪽 3리에 있다는 기록과 북쪽 3리쯤에 있다는 기록이 혼재한다. 가장 최근의 기록인 『홍천군읍지』와 『강원도지』에는 각각 ‘여제단은 군의 북쪽 3리쯤에 있다’, ‘여단이 군의 북쪽에 있다’는 기록으로 보아 북쪽일 가능성이 높지만 군의 북쪽은 석화산이 자리잡고 있어 혼란스럽다.

팔봉산사는 현으로부터 60리 떨어진 팔봉산에 있다고 기록했다.

일제강점기에 발행된 『강원도지』는 시대를 반영하듯 단사와 함께 신사도 기록해 놓았다.

‘신사(神社) 신명신사는 홍천면 희망리에 있다. 소화 갑술년(1934년)에 건립되었다. 천조황대신에게 제사를 지낸다.’

신사(神社)는 일본 황실의 조상이나 일본 고유의 신앙 대상인 신 또는 국가에 공로가 큰 사람을 신으로 모신 사당이다. 천조황대신(天照皇大神)은 태양을 신격화한 신으로 일본 황실 조상신의 하나로 일려져 있다.

원인을 알 수 없는 질병은 공포와 혼란이다. 죽은 혼령에게까지 제사를 지내며 역병을 막아보고자 했던 조선시대 왕의 마음이 조금은 이해가 가는 요즘이다. 석화산 어디쯤에 있었을 여단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면 간결하게나마 제주(祭酒) 한 잔 올리고 싶은 심정이다.

글 백승호(벌력 콘텐츠 연구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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