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대적이고 주관적인 홍천읍지 이야기 18

시대를 막론하고 서민은 늘 사는 게 녹녹치 않다. 아니 녹녹치 않아 서민이다. 코로나로 인해 전 국민이 힘들어하자 정부는 재난 지원금으로 서민의 숨통을 틔워주었다, 급격한 소비 위축으로 소상공인들이 힘들어지자 소상공인들을 위한 별도의 지원책을 시행하기도 했다.

조선시대에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흉년이 들거나 자연재해가 닥치면 평민은 당장 끼니 걱정을 해야 했다. 어디선가 돈을 마련해 쌀을 구해야 했다. 지인에게 융통하던, 대출을 받던 출구를 찾아야 했다. 가을걷이가 신통치 않으면 춘곤기부터가 문제다. 당장 보릿고개를 넘겨야 연명이 가능했다. ‘가난은 나라님도 구제 못한다’는 말이 있지만 나라님도 최소한 끼니는 해결해주려 노력했다. 진창(賑倉)이 그런 목적으로 만들어진 창고다.

진창은 진휼미(賑恤米)를 보관하는 창고다. 진휼미는 흉년이나 재난으로 백성들이 굶주릴 때 백성들의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해 비축해둔 쌀이다. 진휼은 크게 두 가지로 이루어졌다. 가진 것이 하나도 없어 스스로 식량을 구할 여건이 되지 못하는 백성들에게 무상으로 곡식을 나누어 주는 진희(賑餼)와 시중가격보다 저렴하게 곡식을 판매하는 진조(賑糶)로 시행됐다. 춘곤기에 쌀을 빌려주고 가을걷이 후에 갚는 사창(社倉)도 있지만 홍천읍지에는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여지도서』에 홍천에는 13칸의 진창이 있었다고 기록했다.

‘사창은 54칸이다. 진창은 13칸이다. 동창은 32칸이다. 관문으로부터 동쪽 70리에 있다. 북창 은 21칸이다. 관문으로부터 동북쪽 40리에 있다. 서창은 22칸이다. 관문으로부터 서쪽 60리에 있다. 司倉 五十四間. 賑倉 十三間. 東倉 三十二間 自官門東距七十里. 北倉 二十一間 自官門東北距四十里. 西倉 二十二間 自官門西距六十里.’

사창(司倉)은 곡식을 저장하는 창고다. 위에서 말한 춘곤기에 쌀을 빌려주고 가을에 이자를 붙여 돌려받는 사창(社倉)과는 다르지만 혼용해서 사용하기도 했다. 동창, 서창, 북창은 현으로부터 창고의 위치를 가늠해 붙여진 창고 이름이다.

『여지도서 1757~1765』에 남창(南倉)은 보이지 않지만 비슷한 시기에 발행된 『홍천현읍지 1765년 이후』에는 남창에 대한이 기록이 있다. 『홍천현읍지』의 창고에 관한 기록은 창고가 어느 마을에 있었는지에 관해 자세하게 적었다.

‘사창은 44칸이며 관청 정문 밖 우측에 있다. 진창은 12칸이며 관청 정문 안쪽 좌측에 있다. 동창은 28칸이며 현의 동쪽 70리 내촌면 물걸리에 있다. 서창은 22칸이며 현의 서쪽 70리 감물악면 반곡리에 있다. 북

창은 28칸이며 현의 동북쪽 40리 두촌면 철정리에 있다. 남창은 15칸이며 현의 남쪽 40리 금물산면 신대리에 있다. 상정청은 3칸이며 관청 정문의 안쪽 우측에 있다. 관청은 10칸이며 관청 정문 밖 우측에 있다. 司倉 四十四間 在官門外右过. 賑倉 十二間 在官門內左过. 東倉 二十八間 在縣七十里東 奈村面 物傑里. 西倉 二十二間 在縣西七十里 甘勿岳面 盤谷里. 北倉 二十八間 在縣東业間四十里 斗村面 喆亭里. 南倉 十五間 在縣南四十里 今勿山面 新垈里. 詳定廳 三間 在官門內右过. 官廳 十間 在官門外右过.’

『관동지』에 수록된 홍천지도에 홍천현의 사창, 진창, 동창, 서창, 남창, 북창의 위치

내촌면 물걸리, 감물악면(서면) 반곡리, 금물산면(남면) 신대리, 두촌면 철정리에 각각 동창, 서창, 남창, 북창이 있었다. 『여지도서』 공해(公廨) 항목에 적혀있던 상정청이 창고 항목에 기록되어 있다. 『홍천현읍지』 이후 발행된 홍천읍지 대부분 상정청을 창고 항목에 기록했다.

『관동지』 창고 항목은 『홍천현읍지』와 내용이 거의 같다. 다만 『여지도서』와 『홍천현읍지』의 내촌면(奈村面)이 현재 사용하고 있는 한자 내촌면(乃村面)으로, 두촌면 철정리(喆亭里)가 철은정리(哲隱亭里)로 마을 이름이 바뀌어 기록되어 있다. 상정청과 관청은 기록하지 않았다.

이후 발행된 『관동읍지』, 『홍천현 읍지 백원정사 필사본』, 『홍천현지』 모두 내용이 크게 변하지 않았다.

종합해 보면 홍천현에는 크게 사창과 진창 그리고 동서남북에 각각 창고가 있었다. 현의 중심이었던 현내면에 가장 큰 창고인 사창이 있었다. 『여지도서』에는 54칸이라 했고, 『홍천현읍지』에서는 44칸이라고 적었다. 이후 발행된 대부분의 읍지에 44칸이라 적혀 있다.

진휼미를 보관했던 진창은 『여지도서』에 13칸이라 기록했고, 『홍천현읍지 규장각』 12칸, 『관동지』에서는 크게 늘어나 22칸이라고 적었다, 『관동읍지』, 『홍천현 읍지 백원정사 필사본』, 『홍천현지』에는 다시 12칸이라고 기록했다.

동창은 『여지도서』에는 32칸이라 했고, 『홍천현읍지』에서는 28칸이라고 적었다. 이후 발행된 대부분의 읍지에 28칸이라 적었다. 현재 내촌농협, 물걸1리 마을회관, 척야산문화수목원 앞길의 도로명이 ‘동창로’다. 서창은 창고를 기록한 모든 홍천읍지에 22칸으로 기록되어 있다.

『홍천현읍지』부터 기록이 남아있는 남창은 『관동지』만 20칸으로 적고, 나머지는 모두 15칸이라고 적혀 있다. 북창은 『여지도서』만 21칸으로 적고 나머지 홍천읍지에서는 28칸이라 기록되어 있다.

창고는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서 미리 준비해 놓는 비축(備蓄)이다. 비축은 여유다. 먹고살기 빠듯하면 여유가 생기지 않고, 여유가 없으면 비축이 없고, 비축이 없으면 창고조차 필요 없다. 나라살림이 넉넉지 않은 조선시대였지만 각 고을에 창고를 짓고 비축을 했다. 그리고 흉년과 재난재해가 발행하면 창고를 개방해 백성들의 끼니를 해결하고자 했다. 치세(治世)가 예나 지금이나 별반 다르지 않다.

글 백승호(벌력 콘텐츠 연구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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