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고 보면 더 재미있는 홍천의 금석문이야기 ⑨
알고 보면 더 재미있는 홍천의 금석문이야기 ⑨
정탄(町畽) 조원섭의 내촌면의 금석문 소개
  • 조원섭 기자
  • 승인 2021.05.13 1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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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여덟 번째에는 홍천의 중앙에 위치하고 있는 화촌면 송정리의 송정구장 김교하 영세불망비, 홍천의 북동쪽의 두촌면 철정리 기념비군, 자은리 군수 김시명 송덕비, 괘석리의 박구장원약기념비를 소개하였었다.

이번 아홉 번째, 열번째에는 내촌면의 금석문을 2회에 걸쳐 소개하기로 한다.

내촌면은 홍천군의 1읍 9면의 하나로 홍천군 동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1750년도의 조선지도에는 乃村面으로, 1757년도의 여지도서에는 奈村面으로, 1776년의 조선팔도지도에는 內村面으로, 19세기 전반의 광여도에는 금촌면(禁村面)으로, 1830년도 이후의 김정호지도에는 乃村面으로 각종지리지와 홍천현읍지등에 여러 가지 명칭으로 표기되어 있다.

홍천군지에 의하면 1895년(고종32)에 내촌면(奈村面)으로 면소재지는 물걸리 동창에 두고 8개리를 관할하였으며 1910년에 면소재지를 문현리로 옮기고, 1912년에 다시 도관리로 옮겼다고 기록하고 있다. 1942년에는 행정구역을 12개리로 분할하고 명칭을 내촌면(乃村面)으로 개칭하고 1955년 6월 지방자치제가 실시되며 물걸리, 와야리, 서곡리, 문현리, 도관리, 답풍리, 화상대리, 광암리 등 8개리로 통합하고 1981년부터 8개 법정리, 13개 행정리를 관할하고 있다고 한다.

면적은 146.5㎢(군의 8%)이고 인구는 2,400여명이다.

내촌면은 애국충렬(愛國忠烈)의 고장이라고 하는데 1919년 4월 3일 물걸리 동창마을에서 주변 마을과 인제 상남 등 3,000여명의 군중이 을사늑약의 울분을 겪으며, 조직적인 만세운동을 벌이고 일본헌병의 무차별 사격으로 팔열사가 순국하였는데 이를 기리는 기미만세공원이 있으며, 도관리에는 1949년부터 6.26한국전쟁 기간동안 대한청년단, 국민방위군, 지하결사대 등의 조직원으로 조국을 수호하다가 장렬하게 전사하신 영령들을 기리는 호국용사 추모비 / 구국지사 추모비 등이 있다.

홍천군 문화유적분포지도에는 내촌면에 14점의 유적을 기록하고 있는데 물걸리사지의 보물5점, 강원도기념물 1점과 쌍계사지의 3점, 쌍계사내 동해지장사 철불좌상(강원도유형문화재) 그리고 변문희 효자각, 구장 변덕오 기념비, 면장 이완익기념비, 이성옥여사 기념비 등이다.

내촌면내의 금석문은 물걸리 동창마을의 홍천현감 선정비 5기, 순국팔열사기념비, 면장 이완익기념비, 이성옥여사 기념비, 쌍계사지 암각기문 / 부도군 등 6기, 서곡리 덕탄(德灘)암각명 등 15기를 소개한다.

내촌면 물걸리는 물거리(物巨里), 물걸리(物傑里)라고도 하였으며 옛부터 인제, 횡성 / 원주, 강릉 방향으로 통하는 교통의 요지였으며, 통일신라시대부터 조성된 큰 절터가 있어 물걸리사지(강원도 기념물 제47호)를 비롯하여 석조여래좌상(보물 제541호), 석조비로좌나불좌상(보물 제542호), 석조대좌(보물 제543호), 석조대좌 및 광배(보물 제544호), 삼층석탑(보물 제545호) 등이 있다. 조선시대에는 내촌면의 중심지 역할을 하며 동창(東倉)이라는 조세창고가 있었다.

1910년에 면장제도가 시행되면서 내촌면사무소가 있다가 문현리를 거쳐(1910년 9월) 현재의 면사무소 소재지인 도관리로 (1912년 1월) 이전하였으며 동학혁명의 중심역할, 1919년 기미년에는 김덕원열사의 주도로 동창 독립만세운동의 본거지로 홍천만세운동의 정신적 역할의 큰 지주가 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동창마을에 홍천현감 선정비 5기가 세워져 있으며 3.1운동 만세기념탑 / 8열사 순국비 등이 있다.

홍천군 내촌면 물걸리 593 홍천기미만세공원 내에 있다.

물걸리 항일의거는 1919년 4월 3일 장두 김덕원의사의 주도로 5개면민 (내촌,화촌,서석, 내면,인제) 3,000여명이 집결하여 생명을 바쳐 항일 봉기한 역사적인 구국운동이었다.

그러나 이 운동은 민족이 해방을 쟁취할 때까지 역사의 뒤안길에 묻혀있었다. 해방 이듬해인 1946년 당시 마을대표 채희석(봉석)은 최택성의 협조로 팔열사추모보국회를 기성하여 희생자 8명을 열사로 추대하고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탑을 건립키로 하였으나 한국전쟁으로 인해 실현되지 못하다가 1963년 건립되었다.

* 참고문헌 : 홍천군지

● 홍천기미만세공원 ・ 기미만세상 : 홍천군 내촌면 물걸리

1919년 3, 4월 강원도 홍천에서 전개된 독립만세운동을 기념하기 위해 조성된 공원이다. 홍천에서는 1919년 3월말 경부터 김덕원, 전성렬이 주도하여, 4월 3일 물걸리에서 만세운동을 추진하기로 계획하였다. 이들은 전우균과 서석면 수하리의 이문순에게 교통이 편리한 내촌면의 호야리, 문현리, 화촌면의 장평리, 서석면의 수하리, 그리고 인제군 기린면의 상남리, 내면의 방내리에 연락을 취하게 하였다.

그리고 이들은 전영균의 한약방에서 대형 태극기 3매와 수기 30여매를 만들며 최종점검을 하던 중 헌병 보조원 홍재호가 만세시위의 정부를 입수했다는 소문을 듣고 홍재호를 주막집으로 데리고 가 회유하였다. 4월 3일 만세운동은 계획대로 추진되어 1천여명의 군중이 큰 태극기를 높이 게양하고, 수기를 손에 들고 독립만세를 불렀다.

이때 전날 폭행당한 헌병 보조원 홍재호가 헌병 7명, 보조원 1명과 함께 일제히 발포하여 이순극・이기선・이여선・전영균・전기홍・연의진・김자희・양도준 등 8명이 현장에서 즉사하고 20여명이 부상당하였다. 1991년 기미만세공원건립위원회에서 홍천군 내촌면 물걸리 만세운동과 순국한 8열사의 뜻을 기리기 위해 건립하였다.

* 참고문헌 : 홍천군지

● 물걸리사지

물걸리사지(物傑里寺址, 강원도기념물 제47호)는 내촌면 물걸리 동창마을에 위치한다. 내촌면에는 홍천강(화양강)의 지류인 내촌천과 수하천 등이 흐르며, 곳곳에 하안단구가 형성돼 있다. 특히 절터 바로 남쪽의 내촌천은 고대로부터 동해안의 산물이 내륙으로 이동하는 물길이었다.

또한 내촌천은 영동의 사원과 원주의 사찰을 연결하는 교통로이기도 했다. 조선총독부박물관 조선고적연구회가 펴낸 조선 보물고적 조사자료(朝鮮古蹟寶物調査資料)(1942년)에는 동창마을 농지에 절터가 있고, 기와편이 산재하며, 불상 2구와 석탑이 있다는 내용이 등장한다. 통일신라시대의 사찰인 홍양사(洪陽寺) 옛터라고 전하지만 문헌 근거는 찾기 힘들다.

물걸리사지에 대한 조사는 불상 대좌(臺座) 2점, 광배(光背) 1점, 금동불 등이 발견된 1967년 처음 이뤄졌다.

당시 광배와 대좌 등은 주민들이 조립해놓은 상태였다. 불상 주위에는 2칸의 불사(대승사)를 위한 공사가 진행 중이었고, 석불 2구가 있던 곳에는 전각(殿閣)이 세워지고 있었다.

일제 강점기 때 3층 이상이 무너진 탑 꼭대기에는 노반(露盤, 탑의 꼭대기 층에 있는 네모난 지붕 모양의 장식)이 얹힌 상태였다. 조사 결과 절터의 중심은 삼층석탑의 북쪽 평지 일대이며, 석탑의 남쪽에 가람이 있었음이 밝혀졌다. 유물로는사자가 새겨진 불상 대좌 하대석(下臺石), 철불편 등이 발굴됐다.

1979년에는 물걸리사지 정비 사업을 위해 대승사(大乘寺)를 이전했고, 현 위치에 보호각을 만들어 불상을 안치했다. 다만 정비 과정에서 유적에 대한 시굴조사 경과나 결과를 남기지 않아 지표에 교란이 발생했다. 또한 당시 제자리에 있던 일부 장대석(長臺石, 길게 다듬어 만든 돌)과 초석(礎石)이 이탈된 걸로 추정된다.

1982년에는 도기념물로 제47호로 지정돼 정비 당시(1979년)의 모습으로 보존됐다. 국립춘천박물관은 2003년 ‘강원지역 학술조사’의 일환으로 발굴조사를 진행했다.

당시 삼층석탑 북쪽 20m 지점에서 정면 3칸, 옆면 3칸의 장방형 금당지가 발견됐다. 건물지 내부에는 방형전(方形塼)이 깔려 있었고, 북쪽으로 조금 치우친 곳에 불상 3구가 봉안됐음이 확인됐다. 더불어 남북 방향의 건물지는 석탑 동쪽, 초석렬은 금당지 서쪽, 건물지 흔적은 금당지 동남쪽과 석탑 북쪽 4m 지점에서 발견됐다.

유물로는 무문전(無文塼), 당초문(唐草文), 초화문(草花文), 초화문과 오리가 시문된 암막새, 연화문(蓮花文) 수막새, 선문(禪文), 어골문(魚骨文), 사격자문(斜格子文), 집선문(集線文) 와편(瓦片),왕(王)・경(京)・문(文)・ 신(辛?)・정(丁)명 와편, 귀면와편(鬼面瓦片), 착고기와[着錮瓦], 특수 기와, 토기편, 청자편, 납구슬, 청동편, 청동국자편, 철제품, 방추차(紡錘車)와 팔각대좌 하대석 일부 등이 확인됐다. 강원고고문화연구원은 2015년 삼층석탑을 중심으로 5동의 건물지에 대한 조사를 진행했다.

금당지(1호 건물지, 2003년에 이어 재조사)에서는 불상 적심(積心, 탑 기초부에 채워 넣은 흙과 돌) 주변에 설치된 암거시설이 확인됐다.

금당지 서쪽의 2호 건물지에서는 고맥이초석을 사용한 정면 1칸만 확인됐지만 1호 건물지에 부속된 남북 장축의 건물지로 추정됐다.

정면 3칸 이상의 규모로 추정되는 3호 건물지(2호 건물지와 중복)에서는 적심 1열만 발견됐다. 2호 건물지의 기단석렬(基壇石列) 위에 적심을 조성한 걸로 보아 더 늦은 시기에 축조된 걸로 파악됐다. 삼층석탑에서 북쪽으로 5m 떨어진 곳에 위치한 4호 건물지에는 화덕과 아궁이 등이 있어 회랑(回廊, 2003년 조사)이 아니라 요사채로 추측됐다. 

적심 1기와 가단석렬만 노출된 5호 건물지의 규모는 확인하기 어려웠다. 또한 방형 적심, 배수로 등의 유구와 석조대좌(보물543호)의 파편으로 보이는 광배편 일부가 발견됐다. 출토 유물들은 통일신라 후기부터 조선 후기에 이를 만큼 종류가 다양했다. 물걸리사지의 사찰이 해당 시기에 운영됐다고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다.

지금의 모습으로 정비된 건 삼층석탑 외 석조 문화재에 대한 실측(2006년)과 보수(2012년)가 이뤄진 다음이다.

대좌편(2003년) 석조여래좌상 등과 광배편(2015년)은 보호각, 석조 유물은 금당지 동쪽 보호책 안에 보관돼 있다.

* 참고문헌 : 홍천군지

면장 이완익은 제2대 면장으로 재임기간은 1920년 – 1926년까지이다.

건립연도를 최초 비에는 소화 13년으로 되어 있던 것을 해방후 이를 지우고 1928년으로 다시 새겼다고 했다. 그런데 소화13년은 1938년이다.

군수직을 1926년에 마쳤는데 최초에 12년이 지난 1938년에 비를 건립하였다고 하는 것은 맞지 않는 것 같고 , 아니면 소화 13년이 아닌 소화 3년은 아닐까? 하는 의구심은 든다.

내촌초등학교 교정에 위치하고 있다.

여사의 근검절약 정신과 활발한 사회참여를 기리기 위하여 비를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 참고문헌 : 홍천군의 역사와 문화유적(강원대학 강원문화연구소 / 1966) , 홍천군의 문화유적분포지도(강원문화재연구소 / 2007)

다음 열 번째에는 서곡리 쌍계사지 암각기문, 승탑(부도)군, 변우섭기념비, 그리고 서곡리 덕탄(德灘) 암각명을 소개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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