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귀미면 덕치리 수타사의 동종 주종기문(보물 제11-3호), 수타사 중수기현판 소개

지난번 열한 번째에는 홍천군 동쪽의 서석면의 금석문인 현감 민태호 선정비, 동창보 수로 암각명(강원도기념물 제65호), 대한민국만세 암각명 등에 대하여 소개했었다.

이번 열두 번째에는 104년만에 일제강점기의 흔적에서 정감있는 원래의 면 명칭으로 돌아온 영귀미면의 천년고찰 수타사 동종(銅鐘) 주종명문(鑄鐘銘文) (보물 제11-3호), 수타사 중수기 현판(重修記懸板)를 소개하기로 한다.

영귀면은 홍천군의 가운데 부근에 위치하고 있다. 면적은 149.64㎢로 군의 8.2%를 차지하고 있으며, 법정 11개리, 행정 14개리로 인구는 2,000여 세대 3,800여 명이다.

영귀미면이라는 명칭은 조선조대의 각종 지리지 및 홍천현읍지에 詠歸美面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조선지도 (1750-1768년)에만 永歸美面으로 기록되어 있다.

일제강점기인 1917년에 홍천군 소재지의 동쪽에 있다고 하여 동면(東面)으로 개칭되었다가 2021년 6월 1일부로 영귀미 면민들의 청원으로 “ 노래를 부르며 아름다운 곳으로 돌아온다” 라는 詠歸美面으로 104년만에 돌아왔다.

면사무소는 1910년 초대면장이 임명될 때 좌운리에 있었으며, 동면으로 개칭되는 1917년에 속초리 현 동화중학교 자리로 이전하였다가 현 위치로 자리잡게 되었다. 

영귀면에는 오음산(五音山)과 공작산(孔雀山)이 있고, 조선조대의 각종 지리지 및 홍천현읍지에 빠지지 않고 기록되어 있는 덕치리의 천년고찰 수타사(壽陀寺)가 있다. 홍천군 유적분포지도에는 223개의 홍천군유적이 기록되어 있는데 그 중에 영귀면의 56개(24%)의 유적이 분포되어 있다.

유적의 내용을 보면 수타사의 유적을 포함하여 서낭당, 효자각 / 열녀각, 보호수, 한말의병 격전지 / 3.1운동 유적지, 선사시대 매장유물 신고지, 청동시대 고인돌, 대미산성 / 오성산성지, 신봉리 / 오음산 폐사지 등 다양한 종류로 이루어져 있다.

수타사는 태백산맥 줄기에 속하는 공작산에 자리 잡고 있는 고찰이다.

“ 건봉사급건봉사말사사적(乾鳳寺及乾鳳寺末寺史蹟)”에 수록된 “수타사조 (壽陀寺條)”의 기록에 의하면 수타사는 신라 성덕왕 7년(708년) 원효에 의하여 우적산(牛跡山)에 일월사(日月寺)로 창건되었고 선조 2년(1569년)에 공작산 아래로 이건하면서 수타사(水墮寺)로 개칭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창건 당시의 위치는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고 또 창건자인 원효가 686년에 입적하였으므로 창건연대나 창건자의 이름이 잘못 전해진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후세에 사찰의 품격을 높이기 위하여 더러 있었던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수타사는 원효와 전혀 관련이 없어 보이지는 않는다.

수타사 창건 이전에 수타사 전신인 우적산 일월사 부근의 토굴에서 수행정진 하였다고 한다.

또한 수타사의 이건과 관련하여 이 당시에 이건 하였다고 하는 것이 지금의 수타사터로 추정되는데 “홍천현동공작산수타사사적(洪川縣東孔雀山水墮寺事蹟)”에 기록되어 있는 후록을 보면 1567-1572년 연간에 수타사를 옮긴 것은 확실한 것으로 보이나 수타사(水墮寺)라는 명칭은 이미 1530년경에 발간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도 기록되어 있어 수타사 (水墮寺)라는 명칭이 사용된 것은 그 이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창건과 이건에 관한 수타사조(壽陀寺條)의 기록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수타사의 전신사찰(前身寺刹)인 일월사(日月寺)의 위치는 현재로서는 알 수 없으나 수타사 건너편 산기슭에 위치한 옥수암 (玉水庵)과 홍천군 동면에 위치한 신봉리사지(新峯里寺址), 월운리 오음사지 (月雲里 五音寺址) 등이 수타사의 전신사찰(前身寺刹)로 구전되고 있다.

수타사는 임진왜란으로 전소된 후 1636년(인조 14년)에 대적광전 중건을 시작으로 조선후기에 들어서 수많은 건조물을 창건(創建)하고 중수(重修), 중건(重建)하는 과정에서 1811년(순조 11년)에 사찰명을 수타사(水墮寺)에서 수타사(壽陀寺)로 개칭하였다.

건봉사말사사적이 편찬된 1920년대에 수타사에는 옥수암, 쌍계암, 운수암 등 3개의 부속암자가 있었고 건물로는 대적광전, 승당, 흥회루, 봉황문, 칠성각, 산신당, 국사당, 향적전 등 89간의 건물이 있었다고 한다.

현재 수타사는 보물 2점, 강원도 유형문화재 7점, 강원도 문화재자료 2점 등 11점의 문화재를 보유하는 영서지역의 최고의 고찰로 유지하고 있다.

수타사 경내에 있는 현종 11년(1670년)에 쇠를 녹여서 만든 동종(銅鐘)으로 높이 1.1m 구경, 0.74m이며 조선후기 주종장 사인비구(思印比丘)의 작품이다.

사인비구는 뛰어난 승려이자 장인으로 전통적인 신라 종의 제조기법에 독창성을 합친 종을 만들었다. 현재 그의 작품 8구가 서로 다른 특징을 보이며 전해지고 있는데, 이 종은 사인비구의 종들 중 가장 전성기에 제작된 작품으로 추정된다.

용뉴부의 형태는 볼록하게 솟아오른 천판위로 험상궂게 표현된 한 마리의 용이 앞을 바라보고 있고, 용통에는 용의 몸체가 감싸듯이 장식되어 있다. 종의 몸통 윗부분에는 인도의 옛 글자인 범자(梵字)를 둥글게 돌아가며 새겼다.

바로 아래의 네 방향에는 당초문으로 장식한 유곽대를 두고 내부에 납작한 9개씩의 종유(鐘乳)를 표현하였다.

유곽과 유곽 사이마다 보살입상을 1구씩 배치하였고 그 아래에는 종과 관련된 여러 기록들이 돌려져 있는데, 종을 만든 시기와 종을 만드는 데 참여한 사람들의 이름이 각각 네모난 틀 안에 새겨져 있다.

당좌는 다른 범종과 달리 중앙에 연화좌를 두고 그 사방에 연판(蓮瓣)이 길게 뻗어 나온 독특한 모습이다. 이 종은 사인비구가 만든 종 가운데 문경 김룡사 동종(보물 제11-2호)과 함께 완숙미와 독창성이 돋보이는 작품으로 보존상태도 양호하고, 제작 방법도 독특하여 조선 중기의 범종연구에 중요한 작품이다.

* 참고문헌 : 홍천군지

『한국의 사찰현판2』를 저술한 신대현선생은 홍천수타사 중수기를 소개하며 이렇게 언급했다.

「2004년 12월에 강원도를 찾아 여러 사찰을 둘러보던 중 20세기 초에 편찬된 어느 책에 소개되었던 현판을 떠 올리며 홍천의 대표적인 고찰 공작산 수타사에 들렸다.

그 책자에 따르면 수타사의 누각인 흥회루(興懷樓)에 현판이 하나 걸려 있었다는데, 막상 가 보니 현판의 종적은 묘연했다. 흥회루는 그대로이지만 현판은 그안에 없었고 수타사에서 운영하는 박물관이나 또 다른 어느 곳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사찰 관계자에게 물어보아도 모르겠노라는 대답만 돌아왔다.

비록 그렇게 오래되거나 기다란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기록상 나타나는 유일한 수타사의 현판이라는 점에서 가치기 큰 것인데 그새 어디로 사라졌는지 아쉬운 마음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혹시라도 내가 못 본 어느 곳에 잘 간직되어 있는지도 모르겠지만 그것 역시 잘못된 것은 매한가지이다. 현판은 사료(史料)일 뿐이지 경배의 대상은 아니기 때문이다.

되도록 많은 사람에게 보여줌으로써 그 사찰의 역사가 이러했다고 알려 주어야 하는 것이다. 어쨌든 실물은 소개하지 못하지만 기록으로 남아 있는 현판의 내용이나마 소개하고자 한다.」라고 홍천의 역사문화에 관심이 있는 필자로서는 신대현선생께 감사의 마음을 지면으로나마 전한다.

다음 열세 번째에는 영귀미면의 두 번째로 수타사 승탑군내의 홍우당대사 부도와 부도비(강원도 문화재자료 제15호), 서곡당대선사 승탑과 사리탑비, 법당계석 중수기, 기타 승탑 및 비, 좌운리 영세불망비, 삼현리 신현설 도로창선기념비를 소개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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