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방면 역전평리 김정두씨 기념비와 내면 창촌2리 기념비군

지난 열네 번째에는 홍천군 남면의 명덕초등학교내의 선정비군 지금은 유실된 군수 김영진 영세불망철비를 비롯하여 4기와 월천구장 지형심 영세불망비를 소개했었다.

이번 열다섯 번째에는 알고 보면 더 재미있는 홍천의 금석문을 마무리 짓는 북방면의 역전평리 김정두씨 기념비와 홍천군의 가장 동쪽에 위치하고 있는 내면 창촌2리 기념비군을 소개하려 한다.

북방면은 홍천군의 북서쪽에 위치한다. 고려시대(1143년/인종21)부터 홍천현의 북쪽에 있다고 해서 북방면으로 불리다가 조선시대 1393년(태조2년)에 화계면(花溪面)으로 개칭되었다가 다시 북방면으로 환원되어 조선시대 각종 지리지 및 홍천현읍지에 북방면으로 표기되어 있다.  면적은 146.42㎢로 군의 8.1%를 차지한다.

행정구역은 법정 18개리, 행정 20개리로 인구는 약 4,000여명이다.

관내에는 금학산(652m)이 있는데 정상 전망대에서 남노일리를 바라보면 홍천강 최고의 수태극(水太極)문양으로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명소이다.

홍천문화유적분포지도에는 43개의 유적이 수록되어 있는데 원천군 변수영정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118호), 호성공신 홍진교서(보물 제1308호)를 비롯하여 능평리 김효성 묘를 비롯한 조선시대의 여러 묘, 북방리 폐사지 / 장항리 용수폐사지, 구만리 / 하화계리 백이마을 고인돌을 비롯한 선사시대 유적지가  홍천군내에서 가장 많이 분포한다.

특히, 하화계리 석기제작장(춘천국립박물관 전시)은 우리나라 중석기시대의 세석기(잔석기) 대표적 유적지이기도 하다.

북방면에는 금번 소개하는 금석문은 역전평리 김정두씨 기념비 1기이다. 원래 북방면에는 능평리 연산군 김효성 묘를 비롯하여 많은 조선조대의 묘가 있다. 그러나 금번 금석문 소개에서는 묘비는 언급하지 않기로 하였기 때문에 역전평리 김정두씨 기념비만을 소개한다.

역전평리 마을회관 건너편 옛 학교가 있던 자리 입구에 위치하고 있다.

역전평리는 지금은 폐교되었지만 일제강점기에 역전심상소학교가 있던 곳이기도 하다. 비의 내용으로 보아 학교설립에 기여한 공로로 1938년 9월에 홍천군 일동으로 기념비를 건립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학교는 (구)화계초등학교 역전분교장으로 1994년 폐교되었다.

참고문헌 : 홍천군의 전통문화(한림대학 아시아문화연구소 / 1987), 홍천군의 역사와 문화유적(강원대 강원문화연구소 / 1996), 홍천군 문화유적분포지도(강원문화재연구소 / 2007)

다음은 홍천군청 소재지에서 동쪽으로 가장 멀리 위치하고 있으며 홍천군 관할로 1954년 편입되어 역사는 홍천군과 조금 동떨어진 내면의 창촌2리 선정비군을 소개한다.

내면은 홍천군의 가장 동쪽에 위치하고 있다. 원래 명주(강릉)에 속해있다가 1895년(고종32)에 내일면과 내삼면으로 분할되었다가 1906년(광무10)에 인제군으로 편입되었다.

1914년 내일면과 내삼면을 통합하여 내면이라 하였고 1945년 광복 후 남북한으로 분할되며 인제군의 대부분이 북한에 속하게 되어 나머지 지역은 홍천군이 관할 하게되고 1951년 한국전쟁간에 인제군 수복과 함께 홍천에 편입되었던 지역이 인제군으로 복귀되었다. 

1954년 한국전쟁이 끝나고 수복지구 임시행정조치법에 따라 내면이 홍천군의 행정구역으로 확정되었다.

면적은 447.89㎢로 군의 24.6%를 차지하는데 전국 읍면 단위 중에 가장 크며 홍천군청 소재지와 63km 떨어져 있다.  행정구역은 법정 6개리, 행정 17 개리로 인구는 약 3,200여명이다. 

관내에는 석화산(954.5m),  가칠봉(1240.4m),  계방산(1577.4m / 남한 내 5번째 높은 산),  응복산(1359.6m) 등이 있고, 홍천9경 중 제8경인 살둔계곡과 제9경인 가칠봉 삼봉약수 (천연기념물 제530호),  명개리 열목어 서식지(강원도기념물 제67호)가 있다. 

살둔계곡은 전쟁의 화마도 이곳은 비껴간다는 방태산자락의 삼둔사가리의 하나인 살둔마을이 계곡을 품고 있으며 조선시대 영월로 유배된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던 이들이 숨어들며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전해진다. 

가칠봉 삼봉약수는 가칠봉,  응복산 사삼봉 등 세 봉우리에 둘러싸인 곳에서 솟은 약수라고 하여 삼봉약수라는 설이 있고, 세 개의 구멍에서 속는 약수의 맛이 각기 다르다고 해서 삼봉약수라고 부른다는 설이 있다.

창촌2리 선정비군은 내면 사무소 소재지인 창촌리에서 양양방면으로 나아가다가 시가지를 벗어 나면서 도로 오른쪽에 위치하고 있다.

길 건너에는 대동공업사 내면대리점과 한사랑교회가 마주하고 있다.

이곳에는 화강암으로 제작되어 건립된 5개의 비가 세워져 있다.

내면은 1906년까지 강릉(명주)군 이었다가 1906년 인제군으로 편입되어 1914년 내일면과 내삼면이 내면으로 통합되고, 해방후인 1945년 9월 홍천군으로 편입되었다.

창촌2리 선정비군 내의 비는 홍천으로 편입되기 전의 기념비로 홍천현/홍천군과는 관련은 크게 없다.

선정비군의 왼쪽(동쪽)에서부터 소개한다.

강원도지사 이범익(李範益) 관선 제8대 재임기간 : 1929년 11월 – 1935년 3월 1883년(고종 20)∼미상. 조선 후기의 친일파. 본관은 전주(全州)부친은 이원하(李瑗夏)이고, 처는 홍승오(洪承五)의 딸 홍순자(洪順子)이다.

충북 단양 출신으로 어려서 한학을 수학하고, 1903년 외국어학교 일어보통과를 졸업하고, 외국어학교의 교관, 일본 육군성 육군통역, 보광학교 교사, 경성박람회 고문과 심사관 등을 거쳐 농공상 서기관이 되었다.

이때 농상공부대신인 매국노 송병준의 비서관이 되어 함께 일본을 방문하기도 하였다. 1912년 10월 춘천군수(春川郡守)에 임명되었으며, 이후 경상남도 김해(金海), 경상북도 달성(達城)‧예천(醴泉) ‧칠곡(漆谷) 등 각 군의 군수를 지냈다.

1921년 2월 일제 조선총독부 사무관(事務官)을 거쳐, 1924년 10월 황해도 내무부장(內務部長)과 1927년 6월 경상남도 참여관(參與官)을 지냈다.

1929년 11월 강원도 지사(江原道知事), 1935년 2월 충청남도 지사 (忠淸南道知事) 등을 역임했다.

1932년 11월부터 한국 국민을 노예로 만들기 위해 전개한 자력갱생운동인 정신작흥운동(精神作興運動)에 적극적으로 협조하여 황국신민화정책에 박차를 가했다.

1936년에 중추원 참의원과 동양척식회사의 감사직을 거쳐, 1937년 7월에 만주의 초대 간도 성장(間島省長)으로 임명되었다.

간도 성장으로 취임 후 만주제국 정부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치안유지를 강화하여 항일 무장 세력과 그 가족들에 대한 포위 토벌과 박해를 감행하였다.

1938년 9월 15일 일제 조선총독부에 조선청년들로 결성된 특설부대를 간도에 조직할 것을 제의하여 간도성 특별 부대를 설치하였다.

이와 함께 관동군사령부 및 만주국군과 합동으로 간도 일대의 항일무장 역량에 대한 포위토벌을 진행하였다.

더불어 만주제국 조선척식회사에 의뢰하여 만주지역으로의 우리 민족이민 활동을 적극 전개하였다.

또 성내에 있는 산림과 광산자원에 대해 전면적인 조사를 진행하고 자원보유량에 대한 적극적인 조사를 벌이고, 탄광의 채굴, 농업합작사를 증설하여 농촌경제에 대한 공제를 강화하는 등 일제에게 자원 약탈의 조건을 제공하였다.

한편, 그는 각종 언론기관과 간도성 협화회 조직을 이용하여 일본-만주 친선, 일본-조선 일체 등을 선전하여 우리민족을 기만하고 사상통제를 강화하였다.

그리고 학교에 일본인 교원을 증원하고 일본어 수업을 보급하고 왜곡된 교과서도 편찬하였다.

이러한 제도는 학생들에게 노예화 교육을 강화하여 우민교육의 목적을 달성하려고 시도한 일제 식민 정책의 일환이었고, 그는 대표적인 꼭두각시 인물이었다.

1940년 5월에 만주제국 참의부 참의로 취임하였지만 광복 후에 간도 부성장 윤태동(尹泰東)과 함께 소련 홍군에 의해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되었다.

참고문헌 : 강원도사

강원도관찰사 정원용(鄭元容) 재임기간 1827년 3월 ∼ 1828년 7월

1783(정조 7)∼1873(고종 10), 조선후기 문신, 본관 동래(東萊),자 선지(善之),  호 경산(經山), 시호 문충(文忠). 1802년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가주서(假注書)를 거쳐 예문관검열·홍문관 부응교· 이조참의·대사간 등을 지냈다.

1821년 서북지방에 괴질이 크게 번져 10여만 명의 사망자를 내는 등 민심이 흉흉하게 되자 관서위유사(關西慰諭使)가 되어 이를 진정시켰다.

이어 강원도관찰사 등을 지내다가 1831년 동지사(冬至使)로 청나라의 연경(燕京)에 다녀왔다.

1837년 예조판서에 오르고, 이어 이조판서 · 우의정 · 좌의정을 거쳐 중추부판사가 되었다가 1848년 영의정이 되었다.

이듬해에 헌종이 죽자 덕완군(德完君, 철종)을 영립, 중추부(中樞府) 영사(領事)가 되어 정치 일선에서 물러났다.

임술민란(壬戌民亂)이 일어나자 궤장(几杖)을받은 노령임에도 불구하고 삼정이정청(三政釐正廳)의 총재관(總裁官)이 되어 다시 정계에 나섰다. 1863년 철종이 죽자, 원상(院相)이 되어 고종이 즉위하기까지 국정을 관장하였다.

이듬해에는 실록청의 총재관이 되어 '철종실록'의 편찬을 주관하기도 하였다. 권문세가 출신으로 20여 년 여러 차례 의정(議政)을 지냈지만, 늘 검소하게 생활하며 청렴결백했다고 한다.

정원용은 조선시대 관료 가운데 가장 오랜 기간인 72년 동안 관직 생활을 한 인물로 관직에 있으면서 정조에서부터 고종에 이르는 다섯 분의 왕을 모셨으며, 부인 강릉김씨와 60년 동안 해로하여 회혼연을 치렀다. 

관련유물로 경산정원용의대(중요민속자료 제13호)와 정원용묘지명이 있다.  저서로 '경산집(經山集)' 40권과 '황각장주(黃閣章奏)'21권, '북정록(北征錄)' 10권, '수향편(袖香編)' 3권, '문헌촬요(文獻撮要)' 5권 등이 있다.

참고문헌 : 강원도사

지난 2월13일부터 지금까지 약 6개월 동안 “알고 보면 더 재미있는 홍천의 금석문이야기” 라는 제호하에 열다섯 번째에 걸쳐 홍천군 관내 75기의 금석문을 소개하였다.

필자는 역사학자도 향토사학자도 아닌 일반인으로 홍천에 거주하면서 홍천의 향토문화에 매력을 느끼고 홍천의 역사를 공부하며 정리한 바를 소개하였다.

이 분야에 제대로 공부 한 바가 없어 여기저기에서 검색하고 또 현장에서 확인하며 혼자서 정리한 내용이기에 의욕만을 앞세운 많이 어설프기만 함을 인정한다.

그래도 많이 격려해주신 분들께,  지금까지 부족한 내용을 이해하며 읽어주신 분들께,  또 지면을 할애하여 주신 더뉴스 24의 오주원 대표께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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