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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만리 고인돌

정탄(町畽) 조원섭의 향토문화 보고서⑥

2018. 12. 08 by 더뉴스24

홍천군 북방면 반석들길 644-2번지 지용한옥학교 내(옛 구만초등학교 교정)에 있는 아래 고인돌 군과, 북방면 팔봉산로 666번지 故 박동윤씨 댁 뒤뜰에 있는 위 고인돌 군 2개소로 구분된다.

이 고인돌들이 위치한 지역은 옛날부터 반석들이라고 불리던 곳으로 그 이름이 지어진 유래는 바로 고인돌이 반석같이 생겼기 때문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고인돌이 발견된 배경은 구만초등학교 교사 임태준 선생님이 부임하여 이 반석들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부터이다. 그는 1992년 강원대학교 사학과 유적 조사단에 이 반석들에 대하여 조사를 의뢰하였다. 1995년 현지 조사 중 새로이 발견된 고 박동윤씨 집의 고인돌 5기는 주민들의 증언으로 7기였었고 칠성바위 이름이 있었다는 사실로 구만초등학교 고인돌과 고 박동윤씨 댁 고인돌 모두 각각 7기가 있었을 것으로 보여 진다.

사진으로 남은 고인동 옛 모습

현재 학교의 탁자식 고인돌 1기와 개천에 다리를 놓기 위하여 건너질러 놓은 돌 1기가 남아 있었고, 5기는 훼손된 것으로 생각되었는데, 개천의 1기 덮개돌도 지금은 농지개량공사 후 찾기가 어렵다. 고 박동윤씨 댁 고인돌 5기 중 1개는 장독대로 사용하는 것을 포함하여 3기가 뒤뜰에 있고 2기는 울타리 나무 담장 밑에 덮여 있어서 쉽게 잘 보이지는 않는다. 2기는 집 뒤의 인삼밭 속에 있었는데 농사짓는데 방해가 되어 밭에 깊게 파서 묻었다는 증언을 한다.

고인돌들을 채석하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장소는 800여 미터 정도 떨어진 구성말 산기슭과 계곡으로 현재도 유사한 돌들이 산재되어 있다. 반석들 고인돌은 인근지역에서는 보기 드물게 큰 편이며 탁자식 고인돌은 B.C 10세기 경 부터 3세기경 까지 축조되었던 것으로 청동기 시대의 대표적 묘제이다. 이러한 사실로 보아 구만리 반석들 고인돌군도 청동기 시대인 B.C 3세기 이전의 시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구만리 고인돌의 무게는 0.5톤에서 6.5톤까지 여러 가지 이지만 대부분 4톤 이상으로 덮개돌들을 구성(석)말 산기슭에서 옮기는데 많은 노동력이 필요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보통 1톤의 돌들을 옮기는데 16명의 노동력이 필요하다고 연구된 사실을 보면 고인돌들을 축조할 때 노동력이 동원될 수 있는 사회 구조 속에 생활하였던 사람들은 500 - 600명 정도가 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사회구조는 크지 않으나 청동기 시대의 성읍 국가를 조직하는 하나의 구성체로서 참여 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 구만리 청동기 시대의 사회는 인근의 어유포리, 반곡리, 광판리, 산수리 등을 잇는 넓은 지역을 선두에서 이끌어 나가던 부류였으리라고 생각되며 바로 반석들 1호 고인돌(옛 구만초등학교 교정)의 주인은 그 사회의 우두머리인 군장으로 그 일대의 사회를 이끌기 위하여 정치와 제사를 담당 하였을 것이다. 구만리 고인돌은 우리나라 북쪽지방에 많은 탁자식이며 덮개돌만 보이는 것은 앞으로 시굴을 하여 아래 구조를 확인하여야 할 것이다.

1) 아래 고인돌군

1호 고인돌은 현재 지용한옥학교(옛 구만초등학교) 뒤뜰에 보존되어 있다. 덮개돌은 평면 형태가 거의 정사각형으로 주위가 잘 다듬어져 있다. 방향은 동서남북을 모두 네 변에 맞추었으며 덮개돌 받침도 모두 화강암으로 만들어졌다. 덮개돌은 도개됨이 없이 평면을 이루고 있다. 덮개돌 밑에 받쳐 놓았던 동·서의 받침돌은 긴 네모꼴로 비스듬하게 세워져 있으나 남쪽의 받침돌은 빠져 나와 있고 북쪽의 받침돌은 없어졌다.

덮개돌 윗면에 성혈이 33개 파여져 있는데 크기는 지름이 2cm부터 12cm까지, 깊이는 1-7cm로 다양하다. 덮개돌의 크기는290cm×260cm×32cm이며, 동쪽 받침돌은 140cm×58cm×20cm, 서쪽 받침돌은 158cm×56cm×20cm이다. 남쪽에 세웠을 것으로 보이는 받침돌은 120cm×97cm×46cm이다.

완전히 빠져나와 있는 남쪽 받침돌의 높이가 97cm인 점으로 보아 동·서 받침돌의 높이도 58·56cm만이 노출되어 있고 나머지는 땅속에 묻혀 있기 때문에 약 100cm 정도의 높이가 될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통상 고인돌 받침돌은 동, 서, 남, 북 4방향으로 받치는데 북쪽받침돌은 보이지 않고 있다. 무게는 약 6.5톤으로 추정된다.

2호 고인돌은 1호 고인돌 서쪽으로 약 30m떨어진 곳에 도랑을 건너지르는 다리 돌로 놓여 있었는데 (마을 주민들의 증언에 따르면 1호 고인돌 주변에 있던 것을 옮긴 것 이라함) 지금은 확인되지 않아 훼손된 것으로 추정된다.

2) 위 고인돌군

1호 고인돌은 옛날부터 칠성바위로 불리던 것 중의 하나로 구만리 66번지 고 박동윤씨댁 뒷마당에 자리하고 있으나 원래는 현재의 위치보다 북쪽으로 약 5m정도 떨어져 있었으나 장독대로 사용하기 위하여 옮겨 온 것이라고 현 거주자인 故 박동윤씨 가족은 증언한다. 크기는 210cm×162cm×29cm이며 화강암이다.

2호 고인돌은 1호 고인돌에서 동남쪽으로 약 3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긴 네모꼴의 덮개돌로서 장축은 동서이며 하부구조는 땅속에 묻혀 있어 잘 알 수 없다. 덮개돌은 화강암이며 크기는 209cm×141cm×38cm이다.

3호 고인돌은 2호 고인돌 동남쪽으로 약 3.5m 떨어진 곳에 자리하고 있다. 울타리 속에 들어가 있어 전체 규모나 생김새가 명확히 드러나 있지 않다. 화강암의 덮개돌이며 현재는 덮개돌 위에 나무뿌리 등을 잔뜩 올려놓았다. 덮개돌은 장축이 동·서 방향이며 크기는 190cm×170cm×39cm이다.

4호 고인돌은 3호 고인돌 서남방향 3m 지점에 놓여 있으며 암질은 화강암이다. 현재 울타리 바로 안쪽에 있으며 덮개돌은 긴 네모꼴이며 장축은 서북-동남방향이다. 크기는 302cm×196cm×35cm이다.

5호 고인돌은 4호 고인돌의 남쪽에 거의 붙어 자리하고 있다. 암질은 화강암으로 긴 네모꼴이다. 현재는 집 울타리 밖에 있으며 장축은 4호 고인돌과 같은 서북 – 동남방향이다. 매우 작은 고인돌의 덮개돌이다. 크기는 157cm×68cm×23cm이다.

6 · 7호 고인돌은 고 박동윤씨 댁 뒤 동쪽에 7-8m 떨어진 인삼밭(원래는 논이었음)속에 묻혀 있다고 한다. 10여 년 전 상당이 큰 고인돌의 덮개돌이 있었는데 받침돌을 빼거나 눕히고 땅속으로 가라 앉혀 놓았다고 한다. 현재는 그 모습을 찾아볼 수 없으나 언젠가는 발굴하여 정확한 지점과 형태를 확인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구만리 고인돌도 발굴하여 원형을 유지한 상태로 보존되어야 할 중요한 청동기시대의 유적으로 대책이 시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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