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해를 마감하며 무거운 자성의 시간을 갖습니다.

대나무가 다른 나무에 비해서 굵지 않아도 중간에 부러지지 않고 그토록 높이 자랄 수 있는 근거는 중간 중간에 밀도 높은 마디가 있기 때문이다. 그 마디마다에 새로운 무게중심을 두고 다음 마디에 이르기까지 처음처럼 또다시 일관되게 성장하는 패턴을 가졌기 때문에 대나무는 가늘어도 튼튼하게 높이 자랄 수 있다.

인간은 흘러가는 세월중간에 이처럼 눈금을 만들고 마디를 만들고 이름을 붙였으니 그것이 바로 절기다. 이 절기는 대나무 마디처럼, 사람이 또다시 딛고 도약하는 정신적 시발점이요 발판이다. 

필자 자신도 한 해를 마감하는 세모(歲暮)의 절기에 지난 1년을 되돌아본다. 그중 에서도 이제 한 살 된, ‘홍천군지속가능발전협의회’(이하 지속협) 그리고 ‘강원도 지속협’ 일원으로서 활동했던 과정과 환경여건을, 역사의 뒤안길로 잊혀지기 전에, 사심없이 있는 그대로 반성의 시간을 갖는다.

통상 ‘지속가능발전’이란 개념조차 쉽게 이해하기 힘든 뜬구름 같은 것이지만, 기후환경변화가 이대로 가서는 우리 삶의 베이스가 되는 이 지구가 황폐해지고, 코로나같은 치명적 바이러스 출현 등, 예측불허의 변화에 정상적인 인간의 삶이 지속될 수 없겠다는 절박한 현실인식이 유엔차원 선각자들 자각으로부터 출발되었다는 점은 결코 뜬구름이야기나 어느 한 지방의 국부적인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만은 분명하다.

그러나 아직까지 우리 실정에 맞는 어젠다나 전략실행은 먼나라 이야기다. 중앙정부가 이럴진대, 지방은 더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선순위과제인 환경문제도 구체적 로드맵을 제시하지 못하면서, 유엔이 제시한 17개 목표전반에 걸쳐, 이것저것 피상적으로 접근하게되니, 격화소양(신을 신고 발바닥을 긁은것처럼 필요한것을 제대로 해결하지 못해 성에 차지않음) 수준에 머물수 밖에 없다. 빠른 지방은 우리 홍천보다 훨씬 더 일찍 지속협이 출범했지만 이렇다할 성과를 낸 곳은 전국적으로 손에 꼽을 정도다.

그러다 보니 유명무실을 넘어 실질적으로 기능이 정지된 곳도 있다. 1년을 지내고 보니 왜 그렇게 될 수 밖에 없는지 십분 이해가 된다.(후에 설명할 기회가 있을것으로 믿는다) 이는 주무관청만의 책임도 지속협만의 책임도 아닌 모두의 아쉬움이며, 어느 측면으로는 속도의 문제다. 

이런 상황을 간과한 채, 우리는 조직을 급조하고 지원예산확보에 주력했다. 여타 지역사례를 보면서 큰 지원만을 기대하고 불평불만했다. 처음 개척자에게 엄청난 헌신의지와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은 뒷전으로하고, 관계당국의 냉소적이고 소극적인 관심만 아쉬워했다. 

그런관점에서 스스로 자문하고 반성할 수밖에 없는 현실을 고백한다.

한 해를 마감하는 이 시점에서 아쉽고 서운하고 부끄러운 감회를 감출 수가 없다.

 우선, 우리가 관련 지차체에 대해서 불평과 요구만 할 수 있는 자격이 과연 있는가? 하는 것이다. 큰 것을 요구하려면 그만큼 담을 그릇이 준비되어야한다. 소화능력이 부족한채 과식을 하면 소화불량에 걸릴뿐만 아니라, 처음부터 음식을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 수혜를 오히려 당연한 것으로 여겨 치명적 교만병에 걸릴 수 있다.

 간간히 시행된 행사에 대한 정직한 평가를 해 볼 때, 투자된 비용(세금)대비 목적했던 효과는 어떠했는가? 일회성 행사자체가 목적이라면 몰라도 지속적인 효과를 축적해 나아가는 것이, 사업과 조직의 취지라면 알토랑 같은 국민세금 앞에 얼마나 떳떳했느냐 하는 것이다. 책정된 예산이라고해서 무조건 반드시 다 써야만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만약, 내 돈이 들어가는 개인사업에 시간낭비와 인력낭비가 있다면 용인하겠는가?

 지속적인 성과를 도출할 수 없는 일이라면 더 과감히 궤도수정을 하지 않겠는가?

 적지만 상대적으로 큰 부분을 차지하는 인건비에 대한 가성비는 과연 떳떳했는가?

 온전히 맡은 일에, 내 개인 수익사업처럼 진실로 올인 했는가?

비용(input)대비 성과(output)분석을 정량적으로 나타낼 수 없는 영역이라 할지라도, 최소한 내면의 보람이 증명사진보다 커야 한다. 의미보다 보여주기식 행사라면, 책정된 해당예산을 반납하는 것도 결코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특히 금전적 수혜를 받는 상근직이 자신의 고유업무를 통해 그 값을 반드시 하겠다는 기본적인 의지가 없다면, 이는 세금을 내는 국민에 대한 ‘신의 성실 원칙’에 반하는 것이라는 것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한정된 예산을 여러 지원단체에 산술적으로 나누어서 배분해야 하는 실정이라면, 늘어만 가는 유사성격의 단체와, 지속적으로 지출되어야만 하는 고정비(인건비등)에 대한 검증이 없는 한, 변동비(사업비)를 줄일 수밖에 없다.

그렇게 되면 하늘 일(사업)은 줄어드는데, 인건비나 유지비 같은 고정비지출비율이 상대적으로 늘어나게 되기 때문에 예산을 지원하는 입장에서는 은혜적인 자리배분처럼 느낄 수 밖에 없어, 보이지 않는 이상한 구조 ‘갑을 관계’가 형성되는 한편, 예산을 수여 받는 입장에서는 다음 예산을 지원받기 위해서 마치 많은 일을 하는 것처럼 과대포장을 할 수 밖에 없다.

한 마디로 필요한 일을 하기위해서 자리가 있는것이지 자리를 위해서 일을 꾸미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지방인구는 줄어드는데 단체는 늘어난다면 각종 단체에 참여하는 인원은 더욱 중복되어 결국 ‘그 사람이 그 사람’으로 구성될 수밖에 없다. 물리적으로 시간적으로 구색 맞추고 증명사진 찍기에 바쁜 구조다.

나아가서는 세력화된 유권자들의 사익활동에 무방비일수밖에 없다. 그동안 부실경영과 방만경영으로 무너져 내리는 공기업이 사기업으로 이전되면, 구조조정을 거쳐, 다시 든든한 기업으로 회생되는 사례가 많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한마디로 주인 없는 돈과, 주인 없는 조직은, 내일처럼 일하지 않고, 내돈처럼 아끼지 않으며, 실질적인 공헌도 보다 보이기위한 일에 주로 연출 에너지를 쏟았다는 방증인 것이다. 모험보다는 안전제일, 공헌보다는 보신위주의 경영일 수 밖에 없었던 이유다. 그곳에 어떻게 창의적인 발상을 기대하며, 공익을 위해 헌신하는 모습과 경쟁력을 기대하겠는가?

적어도 2~3년에 한 번은 전년도 기준이 아니라, 총체적인 기여도 성과모니터링을 통해 원점베이스 예산편성을 하겠다는 결단이 필요하다. 신청된 예산의 규모를 줄여서 의회 의결만 통과하면 끝나는 게 아니다.

지출된 예산이 합당하게 사용되고 있는지? 당초 목적하는 대로 효과를 발휘하고 있는지? 주요 행사현장을 무작위로 암행모니터링을 1년에 한 두번만 해 보아도, 그럴듯하게 꾸며진 결산서류보다 정성적 깊이와 진정성을 훨씬 더 확연하게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담당 공무원이 편한길을 마다하고, 내 살림처럼 더 고민하고 애쓰는 만큼, 국민의 세금은 훨씬 더 효율적으로 쓰여질 수 있음을 감히 장담한다. 이렇게 예산낭비를 줄여 공헌한 공무집행자에게는 실적에 따라 인사고과반영이나 인센티브를 부여할 것을 차제에 제안한다. 균형과 견제속에 긴장감이 지속될 때 라야 매너리즘과 대충주의가 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지원단체 상근요원이 지금 있는 자리와 미션에 합당한 일을 게을리 하거나, 하지 말아야 할 사익추구로 역량을 약화시킨다면, 이는 공적 위임에 대한 배신이다. 시간횡령이나 공금횡령이나 같은 반열의 부당한 처사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필자를 포함한 모든 관련된 분들이 스스로 자신을 냉엄하게 평가하고 반성할 수 있는 절기가 되기를 바란다. 비록 이번 회기, 이번 마디에서는 양심상  일말의 부끄러운점이 있었다할지라도, 다음 회기, 다음 마디에서는 벽두부터 초지일관, 국민세금(지원금)과 스스로에게 떳떳할 수 있기를 바란다.

예산 배분처나 사용처나를 막론하고 공적자원에 대한 주인의식이 분명할 때 라야 ‘눈 가리고 아웅’하는 머슴근성이 사라질 수 있다. 주인이 되고 싶은가? 머슴이 되고 싶은가? 스스로에게 자문해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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