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만을 위한 것은 ‘나쁜 것’이고 조화로운 것은 ‘좋은 것’이다.

신생아실에서 한 아이가 울면, 다른 아이들도 따라서운다. 그때 자기 울음소리를 녹음해서 들려주면 신기하게 그친다. 누가 가르쳐주지 않았어도, 창조주로부터 부여된 타인에 대한 본능적 공감이 작동하는 뚜렷한 사례다.

이 천부의 공감능력 이야말로 너와 나를 연결시켜 사회를 건강하게 만드는 필수연결매개다. 하지만 걍팍해지는 세상은 갈수록 공감이 줄어들고, 타인의 고통에 둔감해지고 있다.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일이라면, 세상의 이목, 즉 다른 사람이 어떻게 보고 있는지 아랑곳하지 않고, 이면 체면 없이 얌체행위를 하면서도 부끄러움을 모르는 현상 또한 이 공감능력결핍증 때문이다.

심지어 ‘남의 불행이 나의 행복’인 것처럼 비쳐지는, 반 공감적인 세태를 보면, 분명 무언가 잘못되고 있음이다. 이는 공감본능을 무력화시킬 정도로 생존본능이 지나치게 작동할 수밖에 없는, 획일화된 과잉경쟁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생명은 땅에 충만하고 번성키 위해 다양하게 적응하고 진화하도록 창조되었다.

만약 다양성이 봉쇄되고, 똑같은 유전자의 단순복제만 있어서, 동일종의 모든 개체가 똑같기만 하다면, 환경이 급격하게 변화되거나 전염병에 감염될 때 적응하지 못하고 이겨내지 못하면 전멸할 것이다.

만약, 인간도 처음부터 그렇게 만들어졌다면, 과거 흑사병 천연두 스페인독감 댕기열 아직 끝나지 않은 코로나19 바이러스 팬데믹 상황에서 멸종의 길을 걸을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근친혼의 자녀가 원친혼의 자녀보다 면역이 약하고 열성으로 태어나는 것도 이런 생육원리에 반하기 때문이다.

서로가 똑같지 않고 다른 것이야 말로, 변화에서 살아남아 다양하고 풍성하게 번성키 위한 생태적 순리라고 인정한다면, 정형화된 틀 속에 집어넣어서 획일화 시키고 줄 세우는 제도는, 통제와 단순화가 요구되는 군대 같은 특수사회에서나 한시적으로 필요하지 않을까?

다양성을 무시한 채, 획일화가 지나치게 강조되면, 결국 내용(체질)은 빈약하게 되고 형식만 강하게 되었던 사례를 우리는 수없이 경험하고 있다.

정치권이나 종교권이나 문화권을 막론하고 ‘묻지마 팬데믹’에 지배당할 수밖에 없는 세상이라면 우리는 다양한 인격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 따라서만 행동하는 아바타나 복종하고 줄만 잘 서는 로보트에 불과하다는 것을 누가 부정할 수 있겠는가?

그런 세상과 그런 집단은 결국 오래가지 않았음이 역사의 교훈이며, 그러한 세상은 생명이 번성하고 행복해지는 것과는 반대방향이라는 점을 권력자나 평민이나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헤겔의 ‘정반합(正反合) 진화법칙’은 지금도 작동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저작권자 © 더뉴스24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