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긴밭들 9

  하여, 현란한 풍경보다 내 성장의 그림자 품고 있는, 무릎까지 눈 쌓인 시오리 등하굣길 검정 고무신에 신겨 다녀도 입 한번 내밀어본 적 없던, 참외 수박 사과 무 닭 서리해도 눈감아 주던, 참새 박새 콩새 꾀꼬리 직박구리 까치 다람쥐 고라니 염소 밤새 웃음꽃 피우다 쓰러진 풀처럼 뒤엉켜 잠자도 아무 일 없던, 개살구 개복숭아 돌배나무 등속 전구 매달고 주린 입들 시장기 쫓아주던, 산토끼 꿩 물고기 개구리 잡아 허연 버짐 벗겨내며 무럭무럭 자라던, 사람으로 치면 족히 기이는 되었을 밤나무 오뉴월이면 발기되어 길 가는 아낙들 콧구멍 속 파고들어 춘정 발동해도 아무 탈 없던, 오십여 년 전 여린 손재주로 그린 4H 마크 10m 높이의 섬바위에 파랗게 살아 있는, 고봉밥 담던 밥그릇 엎어놓은 듯 레이돔 같은 지붕에 춥, 덮지도 않게 설계된 부모 유택이 있는,

하루 고작 버스 서너 번 다닌다 해도

시인의 밥 수없이 파묻혀 있을 긴밭들 고랑 타고 앉아

젖무덤 무릎에 얹고 제 살가죽 긁듯 북북 긁어주면

발기되어 툭툭 튀어나오는 토색의 시상詩想들

송풍으로 군더더기 날리다 보면

이빨 허옇게 드러내고 진저리치게 웃어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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