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고 보면 더 재미있는 홍천(洪川)의 금석문(金石文)이야기 ⑪
알고 보면 더 재미있는 홍천(洪川)의 금석문(金石文)이야기 ⑪
정탄(町畽) 조원섭의 서석면 금석문(현감 민태호 선정비, 동창보 수로 암각명, 대한민국만세 암각명) 소개
  • 조원섭 기자
  • 승인 2021.06.11 13:4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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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열 번째에는 애국충열의 고장 내촌면의 두 번째로 향기나는 서곡마을의 백우산자락 쌍계사지 금석문과 덕탄여울의 암각명을 소개하였었다.

이번 열한 번째에는 서석면의 금석문에 대하여 소개하기로 한다.

서석면은 홍천군의 동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면적은 225.27㎢(군의 12.4%)이며 내면에 이어 두 번째로 넓은 면적이다. 법정 8개 리 / 행정 14개 리로 인구는 3,800여 명이다.

고려시대에는 노릉군 주우면이라고 하였다고 전하여 지나 조선시대 17세기부터의 각종 문헌과 고지도에는 서석면(瑞石面)으로 표기되어 있어 홍천에서 유일하게

명칭(한글 / 한자)이 바뀌지 않은 면이다.(호구총수에는 동서석면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읍치의 동쪽에 있다는 의미에서 ‘동’이라는 접두어를 붙인 것으로 짐작됨)

* 영귀미면(동면), 감물악면(서면)은 조선시대와 일제 강점기초까지 유지하여오다가 1917년 면의 명칭이 변경되었다.

1916년 8개 리를 정하고 최초의 면장제를 실시하고 1942년 13개 리로 분할하였다가 1952년 다시 8개 리로 재 통합하였다.

서석면에는 아미산(峨尾山)과 운무산(雲霧山), 고양산이 있는데 고양산에는 우리나라 최대의 무궁화나무(수령 100여년, 높이 7.8m, 너비 7.7m, 직경 37cm)가 있다.

『1872지방지도』에는 지금의 청량리와 하군두리 아래에 금산(禁山)이 표기되어 있는데 현재의 운무산을 지칭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금산은 입산이나 벌채가 법으로 금지되어 있는 산을 의미한다. 행치(行峙)와 주치(舟峙)라는 고개는 지금의 행치와 하벳재를 나타낸 것이다.

또 하벳재의 미약골에서 발원하여 흐르는 내촌천은 유로연장이 가장 길어 홍천강의 발원지로 불리며 철정리의 아호(아우라지)에 이르러 장남천과 합류하여 홍천강을 이룬다.

서석면에는 강원도 기념물 2기(동창보 수로 및 암각명, 풍암리 동학혁명군 전적지)와 강원도 문화재자료(김학균 가옥)을 비롯하여 13기의 유적 / 유물을 보유하고 있다.

동학혁명군 전적지는 1894년 교조신원운동의 실패와 전라도 고부군수 조병갑의 포악한 정치가 원인이 되어 일어난 동학농민운동이 점차 전국적으로 확대되어

원주, 양양, 강릉, 횡성, 홍천 5읍의 접주로 불리는 차기석은 1천여명의 동학농민군을 이끌고 홍천군 내면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는데 점차 세력이 커지자 경기도 남부에서

동학농민군을 진압하던 맹영재가 관군을 이끌고 홍천으로 이동하였다.

차기석이 이끄는 동학농민군은 10월21일 장야평, 10월 22일 자작고개에서 전투를 벌여 관군에게 대패하였다.

사망자 800여명과 부상자를 함께 자작고개에 집단매장 하였는데 1976년 자작고개에서 새마을운동 도로공사하던 주민들에 의하여 유해더미가 발견되어 1977년 홍천군에서

동학혁명군 위령탑을 건립하였다. (1977년 11월 28일 강원도기념물 제25호로 지정)

금번 소개하는 서석면내의 금석문은 3기로 서석면사무소내의 현감 민태호 선정비와 동창보 수로 및 암각명(강원도 기념물 제65호), 수하리 대한민국만세 암각명이다.

서석면사무소 입구 화단에 세워져 있다. 이 비는 원래 1865년 4월에 세워져 있었으나 오랜 기간이 지나 비가 마멸됨으로써 1986년 5월에 서석면장 고광환이

다시 세웠다(改竪)고 비의 후면에 표기하였다.

홍천읍 무궁화공원에 행현감 민태호선정비(1865년10월)에 세운 비가 있다.(개인약력 참조)

동창보 수로(東倉洑 水路) 및 암각명(巖刻銘)은 홍천군 서석면 수하리 산204-1번지에 소재한다.  이 수로는 내촌면 물걸리에 벼농사를 짓기 위한 농수 보급을 위해

김군보(金君甫)가 1800년경에 설치한 것이다.  동창보의 동북쪽 암벽에 음각된 ‘보주 김군보(洑主 金君甫)’의 본명은 김치집(金致集)이고, 김치집의 자(字)가 군보(君甫)이다.

보주 김승류(주)라는 음각명도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확인이 되지 않는다.  조선 개국공신인 김곤(金稇)의 16세손으로 동창리(東倉里)에 이거(移居)하였다.

유학에 정진하였으나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고 향리에 은둔하면서 몸소 농사를 지었다.  경작지가 협소하고 관개(灌漑)가 되어 있지 않아 수확이 적고, 기근이 들면

크게 피해를 입게 되자 이를 안타깝게 여겨 전답(田畓)에 물을 공급할 수 있는 저수시설인 보(洑)를 축조하게 되었다.  동창은 마을의 명칭이다.

동창마을은 내촌면 일대에서 가장 번화한 마을이었다.  이 마을이 번화한 이유는 인근지역인 서석과 내촌, 인제군 일부 지역에서 거둬들인 조세[대동미(大同米)]가

동창(東倉)으로 집결되어 보관되었고, 중종때에는 수백 가마의 대동미가 쌓일 정도로 교통의 요충지였기 때문이다.

동창보는 길이 4km 정도의 보수로(洑水路)를 만들어 동창마을까지 물을 공급하였는데, 이후 경작지가 더욱 확장되어 이 보를 이용하는 몽리(蒙利) 면적이 6만여 평이나

되었다고 한다.  현재는 암벽을 깎아 만든 수로 약 200m 정도 남아 있다.  이 보(洑)의 최초 설치시기는 정확치 않다.  * 참고문헌 : 홍천군지

김치집(김군보)

1752(영조28, 壬申)∼? 조선후기 유학자이며 보주(洑主)이다.

자는 군보(君甫)이고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조선 개국공신(開國功臣)인 김균(金稇)의 16세손으로 그의 선대들은 홍천군 서석면(瑞石面) 수하리(水下里) 용호터[용호대(龍虎臺)]

양지말에서 세거(世居)하다가 김군보때 동창(東倉)마을로 이거(移居)하였다.

유학에 정진하였으나 벼슬에 출사(出仕)하지 않고 향리에 은거(隱居)하면서 몸소 농사를 지었다.  경작지가 협소하고 관개(灌漑)가 되어 있지 않아 수확이 적고,

기근(饑饉)이 들면 크게 피해를 입게 되자 이를 안타깝게 여겨 전답(田畓)을 개간(開墾)하고 저수하는 보(洑)를 축조하게 되었다.  그리고 길이 4km정도의 보수로(봇또랑)를

만들어 동창마을까지 물을 공급하였는데, 경작지가 더욱 확장되어 이 보(洑) 물을 활용하여 경작하는 면적이 논[답(畓), 수전(水田)]은 450마지기로 약 67,000여 평이나

되었다고 한다.  현재는 암벽(巖壁)을 깎아 만든 수로 약 200m 정도 남아 있고 후대 지역의 인사들이 김군보 공덕(功德)을 기려 보로(洑路) 옆 암벽에 ‘보주 김군보

(洑主金君甫)’라 새겨놓았으며, 주민들은 김군보의 유덕(遺德)을 추모하며 제사도 지냈다고 한다.

이 동창보 수로는 조선시대 후기의 수리(水利) 및 관개 시설의 형태를 비교적 잘 보여주고 있으며 농경문화(農耕文化)의 역사성(歷史性)을 지니고 있는 유적지이다.

전통적인 논농사로 수도작(水稻作)을 경작하면서 물아구(水入口)는 서석면 수하리 용호터 내촌천(일명 龍虎川, 龍虎江)에서 시작, 내촌면 물걸리 당재봉(堂峙峰) 아래(귀밑터)까지

용수로(用水路)로써 매년 전통적인 김군보 보(洑) 통수식(通水式)을 거행하고 있다.

이 보(洑)는 약 230 여년 전에 보(洑) 수로(水路)로 축조되어 1870년 전후에 출생한 김승중(金承中)이 보를 관리해 “보주 김군보” 라는 암각명문(巖刻銘文)의 사적(事跡)이

남아 있으며 이 보가 동창마을의 세거씨족인 경주김씨에 의해 지속적으로 관리되어 왔던 ‘동창보계(東倉洑契)’ 자료가 전하여 지고 있다.

 현재는 동창마을에 거주 하는 동창보 몽리자(蒙利者)인 계원들 중에서 선출된 보주(洑主)와 보깡구[보감고(洑監考)]에 의하여 관리되어 전승되고 있다.

이 지역에는 매년 봄에 보를 개수한 후 보(洑)의 안녕(安寧)과 풍년(豊年)을 기원하기 위해 산천신(山川神)과 지신(地神)에게 보제(洑祭)를 지내오고 있다.

* 참고문헌 : 홍천군지

서석면 수하리 943번지앞 내촌천에 위치하고 있다.

주변에는 1919년 4월 물걸리 동창 기미독립만세운동 주역인 김덕원열사를 기리는 척야산수목원과 동민기념관이 있으며, 이 암각명은 마을에서만 전해 내려오다가

2019년 3.1독립만세운동 100주년에 즈음하여 알려지게 되었다.  김덕원열사가 만세운동 후 일본헌병을 피하여 은신하던 연규환씨 집 다락방(일명 도깨비집 /

지금은 복원하였음)에 있다가 밤에 강변에 나와 대한민국 독립을 기원하며 한글로『대한민국만세』를 새기었다는 설도 전하여 지기도 하지만 확인된 바는 없다.

다음에는 열두 번째와 열세 번째 2차에 걸쳐 주민들의 간절한 염원으로 2021년 6월 1일부로 104년만에 동면에서 영귀미면(詠歸美)으로 돌아온 덕치리 수타사내의

금석문과 좌운리 영세불망비, 삼현리 신현설 도로창선기념비에 대하여 소개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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