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에는 코로나19로 인해 행사가 취소됐지만 홍천은 매년 팔봉산 당산제를 지낸다. 한국 무속홍천군지부와 팔봉산 당산제 추진위원회가 공동 주관하고 홍천문화재단이 후원한다.2019년 팔봉산 당산제의 현수막에 걸린 문구에는 ‘한 해의 무사안녕을 기원하는 400여 년을 이어온 전통민속문화 팔봉산 당산제’라고 적혀 있다. ‘400여 년을 이어온 전통민속문화’ 문구를 붉은 글씨로 선조 때(1567~1608)인 1590년 경부터 팔봉산 당산제를 지내왔다고 강조한다.정말 그럴까?봄, 가을로 지내는 팔봉산제는 세종(1418~1450) 때부터 있었
황천길도 노잣돈이 든다면자신은 돈이 없어 가지 못한다고천상병 시인 생전에 가난을 한탄했지만이제 보험에 가입하지 않은 자죽어 저승에 이르지 못할 것이다기대 수명 백세 시대품앗이 장례문화 점점 사라지면서독버섯처럼 창궐하는 상조보험들하지만, 상조업체들보장 범위와 절차에 대한 과도한 선전으로신성한 죽음 상품화하고 서열화하여추문화를 부채질한다보험에 가입하여저승길 노자 스스로 마련하는 이들도 있다하지만, 보험 들지 못한 가난한 가장들장례 치를 걱정에 밤잠 설치고 있다
요즘 코로나19로 모임 인원수 제한 등‘사회적 거리두기’를 실천하다 보니 코로나 특수로 이륜차를 이용한 음식 주문 배달이 급증했다. 그로 인해 이륜차 등록 대수와 음식배달 시장 규모도 커지고 있는 가운데 이륜차사고도 증가하고 있다.국토교통부 통계에 따르면 이륜차 등록현황은 2016년(218만688대), 2017년(219만6475대), 2018년(220만9009대)에는 약 1만대씩 증가하더니 코로나 이후인 2019년(223만6895대), 지난해(228만9009대)로 1년 사이에 3~5만여대, 2배 넘게 늘었다.또한 통계청 자료를 보면
홍천읍을 중심으로 동쪽과 서쪽, 남쪽에 각각 영귀미면(동면)과 서면, 남면이 있다. 그리고 영귀미면보다 더 동쪽에 내면이 있다.영귀미면에서 가장 오래된 마을 지명은 노천리, 좌운리수백 년 동안 영귀미면이었던 고을은 1917년 동면으로 바뀌어 100년 이상을 동면으로 불렸다. 그리고 마침내 2021년 6월 1일 자 영귀미면이라는 본래의 이름을 되찾았다, 그래서 아직은 홍천군민에게 영귀미면보다는 동면이 귀에 익고, 입에 붙는다. 정희왕후의 태를 묻은 공작산이 있고, 천년고찰 수타사를 품고 있다.2021년 영귀미면은 속초리, 신봉리, 덕
기상청에서는 3개월 기상전망을 발표했다. 언제 장마가 시작되고 폭염이 얼마나 더우냐는 알 수는 없지만 일단 강수량 예보를 보면 6월에 비가 많이 내리고 7월과 8월은 평년과 비슷할 정도의 비를 예상했다.올핸 6월 하순 비가 자주 많이 내린다는 기상청 예보가 있으니 빗길 사고 예방을 위해 다음과 같이 조금만 더 주의하며 안전운행한다면 빗길 교통사고가 발생하더라도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을 것이다.첫째, 비가 올 때는 도로가 젖어 있거나 수막현상으로 인해 일반도로에 비해 미끄럽고 제동거리가 길 수밖에 없다. 따라서 평소보다 속도를 20퍼
늙고 지친어느 날부터인가 눈 오는 게 싫어졌다하늘하늘 내리는 음표들의 율동사그륵사그락나뭇가지마다바람의 낙하산 타고 내려와 착지도 하기 전에모닥불로 뛰어들어 장렬하게 전사하는
‘스텔스 보행자’란 어두운 밤에 술에 만취되어 도로 위에 누워 있다가 교통사고로 변을 당하는 보행자를 말한다.경찰청에 따르면 지난해 전국에서 발생한 스텔스 보행자 사고는 251건이었고 이중 사망자는 27명을 집계됐다.2017년에는 345건(사망 44명), 2018년 285건(사망 40명), 2019년 374건(사망 35명)이 발생했다 한다.스텔스 보행자 사고는 야외활동이 많아지는 봄 행락철부터 여름철에 주로 발생한다. 발생 시간대는 21시~04시 사이로 어두운 도로에서 빈번하며 지하주차장에서 사고가 발생하기도 한다.사고 유형은 대부
화촌면은 꽃마을(花村面)이었다. 지금은 화촌면(化村面)이다. 2021년 화촌리 마을은 송정리, 굴운리, 구성포리, 풍천리, 외삼포리, 내삼포리, 성산리, 야시대리, 주음치리, 군업리, 장평리로 11개 마을이다.지금으로부터 260여 년 전인 1759년 화촌면에는 결운리, 성산리, 야시대리, 삼정포리, 장평리가 있었다. 화촌면에서 가장 오래된 마을 지명이다. 이중 결운리는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화촌면에서 홍천읍으로 편입되었다.외삼포리와 내삼포리는 삼정포리에서 분리(分里)된 마을이다. 내삼포리와 외삼포리 이전 내삼정포리, 외삼정포리였고,
반짝반짝 은륜이 빛나던 자전거들다 해진 엉덩이에 흙먼지가 누렇고어깨뼈부터 다리뼈까지 온통붉은 반점에 부스럼딱지쩍쩍 갈라진 발바닥에선밀반죽 같은 비듬들이 쏟아져 나와하관을 기다리고 있다한 시절 자전거로 먹고 살던 사람들이 있었다짐받이용이라 불렀던 짐자전거안장 높이 좌우 핸들에는보조대 세 개씩 장착하고넓고 튼튼한 짐받이에쌀 두 가마니 연탄 수십 장 싣고소주 콜라 사이다 박스 육 단 칠 단 쌓고열 말들이 막걸리 나무통 싣고이삼십 리 길 자갈 튕기며 언덕배기 오르던이두박근 삼두박근무쇠 다리의 억센 사내들이제는 임종을 눈앞에 둔,늙고 지친
홍천읍은 오랜 시간 홍천의 중심이었다. 신라, 고려,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오늘날까지 홍천의 정치⦁경제⦁문화의 중심지였다. 그러나 처음부터 홍천읍이 홍천의 중심은 아니었다는 기록이 김정호 선생이 쓴 『대동지지』에 남아있다. 신라 경덕왕 16년(757년) 이전에는 홍천의 중심이 삼정포였다는 것이다.‘벌력천 때 읍지는 삼정포에 있었다. 伐力川時 邑址在三汀浦’삼정포는 지금의 화촌면 내삼포리, 외삼포리의 옛 지명이다.홍천읍은 언제부터 홍천의 중심지였을까? 『대동지지』의 건치연혁을 좀 더 살펴보자.‘경덕왕 16년에 녹효로 고쳤다. 景德王 十六
소낙비가 뜨겁게 쏟아지고 있다미루나무 꺾이고 길바닥 골 파이고봇도랑 살찌고 있다논두렁 터지고 개울둑 터졌다소나기 다녀간 이후살림살이 농작물 물에 잠기고닭과 오리들 폐사됐지만개울물 살이 오르고수심 깊어진 저수지더 많은 풍경을 끌어들였다기이한 현상도 벌어졌다마당에서 미꾸라지 꿈틀거리고가재가 엉금엉금 기어 다녔다지렁이들이 길바닥을 누볐다나도 한때 소낙비처럼뜨겁게 생을 쏟아내던 때가 있었다들고 메치고 굳히고 급소 찌르는차고 지르고 막는선수 생활 뜨거운 소낙비였다거리를 활개 쳤던 근육들은얼마나 매력적이었던가 나도 한때는
회전교차로는 1960년대 영국에서 개발한‘교차로 통행 시스템’으로 회전교차로는 신호기로 운영되는 교차로보다 전기요금 등 유지·보수비가 적게 들고 불필요한 대기시간을 줄여 차량 흐름이 원활하고 교통사고 위험성이 적다는 것이 특징이다.실제로 행정안전부와 한국교통연구원이 일반 교차로를 회전교차로로 개선한 129곳의 교통사고를 분석한 결과, 교통사고 사상자 수는 바뀌기 전 1년간 147명에서 바뀐 후 1년간 73명으로 무려 50.3%나 감소했다고 발표했다.회전교차로에 진입할 때는 일반 교차로보다 더 깊은 집중력이 필요하다. 내가 진입해야
지명은 마을이나 지방·산천·지역 등 땅에 붙여진 이름이다. 지명은 대부분 그 지역의 자연⦁지리적 특성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한번 붙여진 지명은 쉽사리 변하지 않는다. 때론 수백 년 동안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린다. 그러하기에 옛 지명에는 당시의 시대상을 엿볼 수 있는 단초들이 숨어 있다.2021년 현재 홍천은 1읍 9개 면이다. 그러나 조선시대의 홍천읍지에 기록된 면은 9개 면이다. 아쉽게도 내면(內面)의 기록은 없다. 강릉도호부에 속해 있다가 인제군에 이속된 후 홍천과 인제를 넘나들었던 내면은 1945년 홍천군에 편입되면서 198
이른 새벽모이 찾아 날아오는 회색 비둘기 떼십장 눈치 보며움켜쥔 서푼, 그나마요즘엔 장마통이라공치는 날이 많아고단한 날갯짓하루 몸값 받아 쥐고늦은 저녁으로 날아가는
홍천이 들썩인다. 지난 4월 22일 제4차 국가 철도망 구축 계획에 용문-홍천 철도 연장 구간이 반영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진 탓이다. 확정은 아니지만 염원에 한발 다가선 것만으로도 한껏 달아올랐다. 철도의 시작과 끝은 역이다. 역은 사람을 끌어모으고, 그 사람들 사이로 경제가 흐른다. 홍천 기차역을 기다리는 이유다.조선시대에도 역(驛)이 있었다. 교통수단이 버스와 기차가 아닌 말이었다. 역은 공무로 지방을 오갈 때 관리에게 말을 제공하는 곳이다. 역의 말은 마패가 있어야 이용 가능하다. 마패에 그려진 말의 수만큼 쓸 수 있는 것이다.
감금된 물고기는 주둥이가 뭉그러졌다자유지역에서 잡혀와 유리벽 향한 전력질주며칠 후 제풀에 주저앉은 지역탐구뻥끗거리며 수없이 내뱉는 상형문자또 유배지 선정에 골머리 앓는다멀미약에 취한 채 끌려온 천릿길미어터질 공간에서 단식농성으로 몸부림치다한 방에 가야 하는 숙명의 물고기처럼구치소에 든 주둥이도 완전히 뭉그러졌다모른다 기억 없다 날뛰며 오리발 내밀더니거짓말탐지기에 꼬리 내린 시커먼 묵언언제 그랬느냐는 듯 길게 내뱉는 한숨 속 단내숨구멍 빼놓고 전부 다 거짓말이다이젠, 도마 위 한치처럼 미동도 없다
조선시대 홍천에서 누리는 즐거움이 8가지 있다고 했다. 한송재(寒松齋) 김기도(1780~1863) 선생이 말한 화산팔경((花山八景)이다. 화산은 신라시대 홍천의 옛이름이다. 화산팔경 중 1경이 한교보월(漢橋步月)이다. 한교에서 달과 함께 거니는 즐거움을 말한다. 한교는 지금의 홍천교자리에 있던 다리다.한교는 홍천읍지 중 『여지도서』에 처음 등장한다. 『여지도서』에 남소천과 남대천에 각각 학교와 한교가 있다고 적었다,‘남소천. 현의 남쪽 1리 쯤에 학교가 있다. 남대천. 현의 서남쪽 5리쯤에 한교가 있다. 南小川 在縣南一里許 鶴橋.
버스터미널 건너편 청자 다방첫차보다 빨리 깨어나홀로 뻘겋게 달아 있는 십구공탄 난로밤새도록 움츠리고 누웠던 텅 빈 공간 달래며모닝커피 모락모락눈 빠지게 기다리고 있다내복 없이 맨발로 뛰었던 옛 시절 떠올려녹슨 시간 걸레질하려꼭두새벽 동동 구루모에 분칠하고빨간 뾰족구두에 고무줄 몸빼바지문 틈새 비집는 바람에펄럭거리는 가랑이 뜨겁게 달구고 있다주말이면 외출 나온 군인죄다 자리 차지하고 앉아 입에 힘주고 이마에주름잡던 변두리 허름한 다방까지레지의 눈총 따갑게 엽차로 버티면서조물딱거리며 헛소리 읊어댔던 그곳은지금도 벌겋게 달아오르고 있을까
시대를 막론하고 서민은 늘 사는 게 녹녹치 않다. 아니 녹녹치 않아 서민이다. 코로나로 인해 전 국민이 힘들어하자 정부는 재난 지원금으로 서민의 숨통을 틔워주었다, 급격한 소비 위축으로 소상공인들이 힘들어지자 소상공인들을 위한 별도의 지원책을 시행하기도 했다.조선시대에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흉년이 들거나 자연재해가 닥치면 평민은 당장 끼니 걱정을 해야 했다. 어디선가 돈을 마련해 쌀을 구해야 했다. 지인에게 융통하던, 대출을 받던 출구를 찾아야 했다. 가을걷이가 신통치 않으면 춘곤기부터가 문제다. 당장 보릿고개를 넘겨야 연명이 가
고요히 흘러가는 강물이 뼈를 깎다 말고움츠려진 가슴속에 달빛 가득할 때면빨간 페인트 글씨로 도배한 유리창 밖에 감금된드럼통, 화덕 깔고 앉은 대형 양은솥새벽녘까지 칙칙폭폭 칙칙푹푹 노래하며드럼 치듯 들썩들썩 신나게 춤추다가지나가는 콧구멍 벼락같이 꿰어 끌어오는 호객